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의 밑그림

이형주, 『사향고양이의 눈물을 마시다』, 2016

by 달리

나는 동물을 먹는다. 적어도 하루 한 번 고기가 들어간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나는 분명 동물을 먹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말이 적잖이 불편하다. 내가 그동안 식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표준화된 가공 공정을 거친 고기(肉類)였지, 살아 움직이는 짐승(動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둘을 의도적으로 분리했다.


물론 알고는 있었다. 내가 먹는 고기가 한 때 어딘가-아마도 매우 비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머릿속에서 동물의 온기를 의식적으로 도려내는 작업은, 고기를 먹는 일상적 행위가 매번 죄의식으로 얼룩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사회적 합의다. '우리는 그저 육류를 소비한 것뿐이므로 누구도 우리를 거칠게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동물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양심의 안전장치이자, 동물이 부당하게 고통받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종교적 선언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인간은 각자 자신의 삶에 충실한 것뿐이다. 동물들의 생태계에서 살기 위한 사냥에 죄를 묻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양질의 삶을 지속하기 위한 인간의 소비행위에도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동물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는 최선의 관점일까. 만약 동물들에게 정교한 언어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그들로부터 어떤 말을 듣게 될까.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AWARE)'의 이형주 대표는 그의 저서 <사향고양이의 눈물을 마시다>에서 다양한 동물의 사례를 근거로 들며 인간의 잔혹한 이중성을 파고든다. 책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을 학대하는 일은 단지 삶의 필수적 요소를 충족하기 위해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널리 알려진 루왁 커피는 말레이사향고양이가 배설한 커피콩으로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인접 국가들에서 대규모 농장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곳의 사향고양이들은 한평생 비좁은 우리에 갇혀 강제로 급여되는 커피 열매만 먹고 배설하는 일이 전부인 삶을 살아간다. 사향고양이들의 고통으로 만들어진 커피는 우리나라 호텔 커피숍 기준, 한 잔에 5만 원 정도 가격으로 맛볼 수 있다. 인간의 소비는 과연 사향고향이들의 끝 모를 고통과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인가.


이 책은 그 밖에도 수많은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려준다. 좁은 공간에 맹수를 가둬놓고 사냥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캔드 헌팅(Canned hunting), 심각하게 부상당한 소의 심장에 칼을 꽂는 스페인의 투우, 살아있는 악어의 가죽을 벗겨 만드는 에르메스의 명품 버킨백(Birkin bag), 어린 코끼리를 관광상품으로 길들이기 위해 상자에 가두고 쇠꼬챙이로 찌르는 동남아시아의 파잔(Phajaan), 쓸개에 연결된 파이프로 쓸개즙을 착취당하는 중국의 사육 곰, 진돗개 쇼와 흑돼지 쇼를 비롯한 각종 동물쇼와 체험 프로그램으로 관광업을 유지하는 제주도까지. 오로지 인간을 위해 동물들이 견뎌야 하는 고통의 무게는 실로 가혹하다. 이토록 다른 생명을 아프게 하면서도 웃을 수 있는 존재는 지구 상에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동물을 학대하는 것이 아니다. 책에 소개되는 사례들이 명백히 시사하는 바, 인간은 쾌락을 얻기 위해 동물을 학대한다.


이 모든 학대를 직접 저지르지 않은 나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답하기에 나는 지금껏 너무도 태연하게, 그들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간 내가 먹고 입은 동물의 죽음은 나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느끼며 외면했다. 나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준에 따라 동물을 먹고 입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만약 내가 이런 이유로 동물들의 고통 앞에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다면, 앞서 등장한 모든 동물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책임 또한 인간의 합법적 권리라는 차가운 이름 아래 가뭇없이 가라앉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개인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말끔한 해법이라 해도 이제 와 짐짓 큰소리치며 내세울 일은 아닌 듯싶다. 한 사람의 거듭남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동물의 삶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보탬이 되겠다는 의지와 실천이 아닐까. 완벽한 삶을 사는 한 사람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시도하는 삶을 사는 여러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말이 나의 느슨한 실천에 대한 죄책감을 상당 부분 덜어주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준 따뜻한 생각과 동물을 향한 진심 어린 사랑이 전하는 울림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동물이 동물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인간과 동물이 더불어 살며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을 향한 희망이다. 이 작은 희망은 분명 우리 모두를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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