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그럼에도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2014

by 달리

황정은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어둡고 비관적인 세계관을 품고 있다. 가장 아늑하고 포근해야 할(또는 그렇다고 간주되는) 가족의 모습도 이 소설 속에선 그렇지 않다. 가족은 세계의 축소판일 뿐, 그 차갑고 무의미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인간이다. 작고 하찮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 사라져 버려도 이상할 것 없는 인간만이 이 무의미한 세계에 억지로 다양한 의미를 불어넣으며 살아남는다. 가족은 그런 의미부여의 결정체가 아니던가. 그 어떤 동물종도 인간만큼 제 피붙이의 의미를 확대해석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적, 유아적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소라와 나나는 자기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각각 '금주씨', '애자씨'로 칭한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자매가 가족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볼 때 그것이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전형적인 가족의 이미지에서 한참 빗나가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금주씨는 공장에서 일하다 거대한 톱니바퀴에 말려들어가 죽었다. 소라와 나나 자매가 각각 열 살, 아홉 살 때의 일이다. 상실의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을 나이인가. 역시 알 수 없지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일 이후 애자씨의 인생관이 일종의 허무주의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이다. 두 딸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학습된 모성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하루하루에, 금주씨만 모질게 죽어 사라져 버렸다. 남겨진 애자는 딸들에게 인생의 덧없음을 말한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애자의 태도는 이런 식이다.


애자는 요즘도 밤에 전화를 걸어옵니다.
가엾게도.
애쓰지 마.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덧없어.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227쪽


별로 없어, 좋은 건.
그러니까 그런 걸 기대하며 살아서는 안되는 거야.
기대하고 기대할수록 실망이 늘어나고, 고통스러워질 뿐인 거야.

57쪽


좋을 게 별로 없는 세상에서 나나는 모세라는 남자를 만나 임신을 했다. 소라는 나나의 임신을 불안해하면서도 충분히 거리를 두며 배려하려 애쓴다. 그런 자매가 사는 집에 어느 날 요양원에 있는 애자씨가 전화를 걸어와 말한다.


왜 너희는 행복하니.
왜 너희만 행복해지려고 하니.

137쪽


보통 이런 감정을 모성애라 부르지는 않는다. 애자는 비정한 사람인 걸까. 그럴 리 없다. 나나는 애자씨가 금주씨를 전심전력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안다. 그녀의 이름처럼, 애자씨가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는 것도 안다. 알기 때문에 나나는 그 전심전력이란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랑이 다름 아닌 나를 향한 모성애일지라도. 그 모성애가 질투로 얼룩져 송곳처럼 날카롭게 나를 찌르더라도. 크게 기쁠 일도, 깊게 절망할 일도 아니다. 나나는 끝내 애자씨를 엄마라 부르지 않는다. 그건 모자란 사랑에 대한 반감이 아니다. 떨어내려 해도 끝내 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애처로움이다.


모세는 그런 나나의 남자 친구이자 나나가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다. 나나는 모세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뜻밖의 물건을 발견한다. 바로 모세 아버지의 요강. 화장실 두 개가 딸린 번듯한 아파트에서 굳이 요강에 똥과 오줌을 눈다는 그의 아버지. 더 놀라운 건, 그 요강을 비우고 씻는 사람이 그의 어머니라는 사실이다. 엄마를 '애자씨'라고 '남 부르듯이' 부르는 나나로선 충격적인 가족의 단면이다. 도대체 가족이 뭐길래 남의 똥오줌까지 치우는가.


모세씨는 궁금한 적 없었나요, ……아버지는 왜 요강을 남의 손으로 비울까, 어머니는 왜 남의 요강을 비울까,
……
남이라뇨,
……
남이 아니에요?
어떻게 남이죠?
남인데.
가족인데.
가족은 남이 아닌가요?
남이 아니죠.

147쪽


그러면 모세씨는요? 모세씨도 가족인데, 모세씨도 요강을 비워본 적 있나요.
……왜 그런 걸 자꾸 물어요?
궁금해서요.
모세씨는 한숨을 쉬면서, 등받이 쪽으로 푹 꺼지듯 기대앉더니 부부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두사람은 부부잖아요, 부부 사이에 그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런 말을 끝으로 이제 이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 탁자 쪽으로 몸을 당기고 왕성하고도 완강하게, 샐러드를 먹었습니다.

148쪽


모세씨는 나하고 틀림없이 결혼할 생각인가요?
네.
아이가 있으니까?
그게 수순이기도 하고요.
수순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라고 되묻는 모세씨에게 당연하지 않아요,라고 답했습니다.
나는 모세씨하고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149쪽


때때로 복잡하고 섬세한 생각들은 타인의 가벼운 말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압도된다. 왜 남의 요강을 비우나요. 가족이니까요. 당신도 가족 아닌가요? 난 자식이고 두 사람은 부부잖아요. 당신도 나랑 그런 부부가 될 건가요. 당연하죠. 이런 대화 속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는지 진짜로 모를 수가 있을까 싶은데 있다. 놀랍게도 아주 많다. 한 나라 인구의 거의 절반에 육박할 만큼. 어쩌면 더 될지도. 이런 세상을 낙관한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바람직한가. 바람직하기까지 하다면, 그것은 올바른가. 소설의 미덕은, 이를테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데에 있다.


세계는 어때? 괜찮아? 아기를 낳아도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은 괜찮아? 나를 왜 태어나게 했어, 아기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지? 저기, 인간의 수명은 보통 팔십년이잖아. 그런데 내내 불행할 뿐이라면 어쩌지? 나 때문에 태어난 아기가, 삼십년이고 사십년이고 불행할 뿐이라면 어떡하지? 괜히 태어났어,라고 생각한다면? 생각하고 생각해도 생각할 것이 남아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더 생각하고 싶은데, 그런데 생각을 더 하다보면 이렇게 더 생각하는 것이 좋은가, 정말 좋은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돼. 있잖아, 모두들 어떻게 하는 걸까. 모두들 어떻게 아기를 만들어? 어떻게 아기를 낳아? 모두 이런 걸 부지런히 생각하며 아기를 만드는 거야? 실은 모두들 부지런하게 이런 걸 고민한 결과로 아기를 낳고 살 결심을 하는 거야?

183쪽


걱정이 된대. 그런 데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사니까 험악한 일도 자주 벌어질 테고 새터민도 많이 살고 무엇보다도 편부모 가정이 많아서, 거기서 자란 애들하고 자기 아이하고 섞여 자라는 게 싫다는 거야. 편부모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의 돌봄이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발달에 격차가 생긴다는 거야. 걔네들은 정서적으로도 불안하고 말도 어눌하고 학습도 별로, 여러모로 부족한 경우가 많대. 그렇게 건강하지 못한 아이들하고 이웃하고 살면서 자기 애들이 영향 받을 게 걱정된다는 이야기였어. 그건 진짜일까? 정말 그럴까? 왜냐하면 이제 내가 편부모잖아? 내가 편부모가 될 예정이잖아? 그러면 내 아기는 부족해질까?
……
편부모가 아닌 상황이라면 부족하지 않아? 편부모가 아니라면 무조건 사랑받으면서, 건강하게 자라게 되는 거야? 자기들은 편부모 상황에서 자라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을 다 걱정하고 있는 거지? 그런 게 건강한 거라면 나는 건강하지 않아도 좋아.

199쪽


마음 아픈 이야기보다 더 아픈 게 현실이다. 이 이야기가 내게 이리도 익숙하게 들리는 건 내가 실제로 여러 번 들어본 말이기 때문이다. 서울 어느 비싼 동네에서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이사 왔다는 한 아이의 엄마는 담임교사인 내게 상담하러 와서 "이 지역 부모님들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잖아요. 경제 수준이나 교양이나, 못 사는 나라에서 파트너를 사 오거나, 한쪽이 없는 집도 많고요." 하며 은밀히 목소리를 낮췄다. 그 말에 내가 당연히 공감을 표할 것처럼 보였나. 왜 그렇게 보였을까. 물론 나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어딜 가나 그렇게 속삭이고 다녔겠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저 열등감의 노예라고 뻔뻔하게 치부했겠지. 누군가는 그런 말에 반사적으로 혐오감을 느낀다는 건 상상도 못 하겠지. 결국 한 사람의 상상력이 그 사람의 인격을 규정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

187쪽


한편 이 이야기에는 자매 말고도 나기라는 독특한 이름의 주인공이 있다. 나기는 자매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기는 여러 면에서 모세와 대조되는 인물이다. 물론 같은 점도 있다. 이를테면 딸기 편식 같은 것 말이다.


나기와 모세는 둘 다 딸기를 먹지 않는다. 껍질 때문이다. 나기는 과일 가게를 하시던 어머니가 매일같이 가져오던 남은 과일들-물크러져 껍질을 벗겨 먹어야 했던-에 익숙해진 탓에 성한 과일도 껍질을 벗겨먹게 되었다. 모세는 어떤 과일이든 어머니가 과도로 껍질을 벗겨내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받아먹는 사람이다. 수확하는 과정에서 어떤 오물이 들러붙었을지 누가 알겠냐면서. 때문에 둘 다 껍질과 과육의 경계가 모호한 딸기는 먹지 않는다. 같은 습관에 이만큼이나 서로 다른 사연이 있다. 이 두 삶의 다른 면들은 또 어떨까. 이렇듯 숨같이 흔한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품격을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인간의 품격은 일련의 외적인 조건들에 쉽게 가려진다. 나기의 낡은 차와 모세의 은색 신형 차처럼. 나기의 낡은 집과 단지 내 도로가 형성된 모세의 아파트처럼.


생의 가려진 품격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게 중요하기는 할까. 어느 노회한 작가의 말대로 불평등이란 개선해야 할 조건이나 상태가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삶의 불평등에서 오는 이질감을 상쇄하기 위해 가려진 품격을 애써 드러낼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알아보는 사람끼리 그냥 그런대로 부대끼며 살아가면 되지. 황정은이 계속해보겠습니다를 통해 하려는 얘기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건 정말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닌가.


이 책에서는 소라와 나나와 나기가 번갈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중 소설의 제목으로 쓰인 '계속해보겠습니다'는 명백히 나나의 말이다. 뭘 계속해본다는 걸까.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내게는 '삶'을 이어 나가 보겠다는 뜻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비관적인 세계에 염증이 날 만도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해보겠다는 뜻으로 느낀다. 소설의 끝에서 나나는 말한다.


애자는 요즘도 밤에 전화를 걸어옵니다.
가엾게도.
애쓰지 마.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덧없어.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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