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은 친절한 영화다. 내가 이 영화를 친절하다 말하는 이유는, 감독이 우리 사회 젠더 기득권의 집단적 오독과 패닉의 가능성을 섬세하게 고려한 끝에 메시지를 거의 떠먹여 주다시피 하는 방식의 연출을 택했기 때문이다. 쇼트와 앵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정하고 카메라 무빙도 최소화했다. 원작의 결말을 수정하여 희망적으로 마무리했다. 좋은 남편과 괜찮은 여건, 아늑한 보금자리와 사랑스러운 딸의 존재까지 그야말로 번듯한 가정에서도 한 여성의 삶이 휘청거릴 수 있음을 별다른 장치나 기교 없이 매끄럽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원인과 책임이 여성 개인에 있지 않음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알려주었다. 덕분에 단선적이면서도 묵직한 메시지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빨려 들어간다. 이런 영화가 친절하지 않다면 어떤 영화에 친절하다는 수사를 붙일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영화에 제일 감사를 표해야 할 사람들이 되려 화를 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짠하고 안쓰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하나씩 살펴보자. 회사 여자화장실에서 불법 촬영 범죄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 남직원은 법적 조치를 강구하는 대신 사내 비밀연애 중이던 여직원에게만 그 사실을 알린다. 학창 시절 스토킹을 당해 겁에 질려 우는 지영(정유미)에게 아버지는 치마를 짧게 입고 다니지 말라며 발끈한다. 이 아버지는 또 취업면접 합격연락을 기다리며 침울해하는 딸에게 가만히 있다가 시집이나 가라고 말한다. 2세 계획 때문에 시가 어른들께 닦달을 당한 지영에게 남편인 대현(공유)은 이참에 하나 낳자고 너스레를 떤다. 능력을 인정받고도 기획팀 편성에서 밀려나 당혹스러워하는 지영에게 상사인 김팀장은 5년 이상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여직원은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 공론화하기보다 피해자 개인에게 은밀히 책임을 묻던 이들 모두가 명백히여성 혐오의 주체인데, 과연 이들은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더욱 절실하다.그들은 저마다 진심으로 피해자를 대했고, 진심이면 무조건 통하는 줄 아는 사람들은 자기네 그릇된 진심보다 통하지 않는 상대방을 손가락질하는데 익숙하다.
극 중에서 몇 번의 플래시백으로 드러나는 김지영의 과거 에피소드는 여성의 차별적 지위와 그들의 연대, 이를 바라보는 외부의 편견 어린 시선과 비열한 조롱,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와중에도 영화의 톤은 전체적으로 덤덤하다. 원작 소설이 그랬듯, 영화도 역시 절제의 미가 돋보인다. 소설이 바탕으로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그 에피소드들은 특별히 극적으로 치장할 이유가 없는 일상적 경험들이기 때문이다. 무심한 듯 거침없는 서사에서 공포를 느끼고 연대하는 것은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를 가능하게 한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과 관객들의 몫이다.
예컨대 영화에서는 짧은 웃음 뒤 곧바로 긴 정적이 이어지는 장면이 두세 차례 등장한다. 어딘지 힘없어 보이는 김지영 씨가 그래도 아직까진 좀 웃나 싶어 안도하려는 바로 그 순간 숨 막힐 만큼 정적인 적막이 찾아온다. 침묵의 순간에도 메시지는 전달된다. 어쩌면 익숙한 독백이나 한숨보다 더 효과적으로. 영화는 짧은 웃음조차도 곧 소거되어야 할 만큼 팍팍한 삶과, 고요히 한가로운 가운데에도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생의 단면을 성공적으로 포착하여 보여준다. 이렇듯 쇼트의 전환으로 작품 전체의 뉘앙스를 녹여내는 연출에서 감독의 영민함을 읽을 수 있다.
영화는 닫힌 공간과 침묵을 메시지로 활용한다.(사진 출처 : 영화 <82년생 김지영>)
영화는 폐쇄적 공간감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도입부에서 회색의 싸늘한 톤으로 묘사된 좁은 거실은 창밖의 하늘과 대조되며 아늑한 느낌보다는 굴레 같은 불안감을 자아낸다. 영화의 주무대인 '집'은 김지영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시가와 친정을 번갈아 묘사하지만 그리 다채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다 다른 집임에도 이질감이 없는 이유는 그 집들이 하나의 본질, 즉 여성을 억압하는 문화적 코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결 따뜻한 톤으로 묘사되는 결론부의 거실은, 김지영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온 익명의 수많은 여성의 삶이 이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노골적으로 관객을 향해 건네는 메시지도 수 차례 등장한다.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커피나 사 마시고 싶다는 사람들을 피해 공원을 떠나던 김지영이 결론부에 자기 보고 맘충이라며 수군대는 차별주의자들에 맞서는 장면에서 그런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대담하지만 무례하지 않고, 단호하면서도 공격적이지 않다. 사실 이 영화나 원작 소설 모두 젠더 기득권을 비난하고 그들과 대립하기보다는 대화와 이해를 청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관객들은 그 요청에 응할 수 있을까. 쉽지 않겠지만 그러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어떤 일들은 이해 가능한 영역의 바깥에 있다는 것부터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남성의 입장에선 결코 실감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을 어떤 세계가 여성들에겐 냉정한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출발점이다. 남성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결국 이 영화가 요청하는 이해는 여성들의 고통을 빠짐없이 느끼고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그건 가능하지도 않다), 그동안 숨 쉬듯 벌어졌던 부당한 차별에 말없이 고통받은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저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내러티브의 현실성이 떨어져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견해가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픈 아내를 진심으로 걱정하면서도 차마 손에 든 맥주 캔을 내려놓지 못해 집안일하는 지영을 바라만 보는 대현의 모습처럼 모든 장면이 극사실주의로만 꾸며질 필요는 없다. 생각해보라. 김지영이 앓고 있는 빙의와 유사한 증상부터가 현실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케이스인데, 극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작품이 이런 소재를 전면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갈 리는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김지영이 보이는 증상은 특정 여성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그동안 소거된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한 극 중 장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영화에서 김지영은 유독 기구한 삶을 사는 한 여성이 아니라 수많은 차별받는 여성을 매개하는 익명의 존재다. (이는 조남주 작가가 주인공의 이름을 김지영으로 지은 것과 그녀의 생일을 만우절로 정한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현실성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이 영화의 설득력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이야기가 얼마나 현실적이냐는 질문은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차별받는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고, 누군가 그 목소리를 듣고 연대하는 것이다. 마치 김지영이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스스로 출구를 찾아나가는 것처럼.
이를 위해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작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마치 등장인물과 인터뷰를 하듯 자주 전환되는 쇼트와 비스타 비전으로 촬영된 화면비가 영화의 내러티브와 어우러지며 무의식 중에 몰입감을 더한다. 이것이 스크린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집집마다, 회사마다, 거리마다 공기처럼 존재했던 일임을 느끼게 한다. 내가 모른다고 없는 일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운다. 개봉 전부터 잡음을 일으켰던 카피,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당신과 나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묘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작품을 둘러싼 거의 모든 요소가 메시지를 구심점으로 단단하게 조직되어 있다. 이 영화로 이루고자 했던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한 감독의 강렬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상업성과 예술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두루 확보한 수작이다. 인간의 삶이 예술로 치료받고 성장할 수 있다면 이 영화가 그 가능성을 증명한 하나의 사례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둘러싼 잡음은 예술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크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가장 빛나는 가로등에 눈먼 하루살이들이 모여들듯이. 추한 자들의 다급한 아우성은 이 작품의 밝기를 증명하는 훌륭한 장식품이다. 물론, 그들을 경멸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