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 않은 유년의 추억

오정희, 『새』, 문학과지성사, 1996

by 달리

아이가 불행하게 죽고, 그 아이를 지키지 못한 어른들이 타는 마음으로 애도를 보내고, 우리가 만들어온 사회가 아이에게 그리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프게 시인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너희를 잃지 않겠다 다짐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무심히 흐른다. 묵은 책을 다시 꺼내어 읽는다.



소설 『새』의 주인공 우미와 우일은 불행한 아이들이다. 이들은 어린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친절과 배려를 경험하지 못한 채 가뭄 같은 삶을 이어간다.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우미네 가족과, 그것도 가족이라고, 그나마 믿고 비빌 언덕이라고 자꾸 비벼대는 철없는 아이들의 맹목을 그저 앉아서 보고 있으려니 못내 불안하다. 왜 삶은 유독 어떤 이들에게만 이리도 잔인한가.


인생의 혹한기를 유년에 벌써 경험한 아이들에게, 깊고 진실된 사유란 한갓진 사람들의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불행을 응시하는 것은 불행하지 않은 사람들의 일이. 불행한 사람들이 그 안에 빠져 허우적대는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지는 제의다. 이 경건한 제의를 주관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그들은 불행에 대해 충분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답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위선을 피하기 위해 부러 위악을 부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름답지는 않았어도 움켜쥘 만한 추억이 그들 불행한 유년에도 존재지 않을까. 그렇다면 극단적 불행 구실 삼아 그들 삶에서 눈을 돌리기보다, 더 깊이 응시함으로써 우미와 우일의 손에 한 움큼 추억을 돌려주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우미는 우주에서 가장 예쁜 사람, 우일은 우주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각각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다. 물론 그런 우주는 없다. 그런 우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잠깐 있었을 뿐. 그곳은 우일이가 즐겨보는 TV 만화영화 <우주 소년 토토> 속 우주만큼이나 멀고 터무니없다. 정작 현실에서 우미와 우일이가 근사해질 기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아이들의 이름을 짓고 미소 지었을 엄마도 지금은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엄마가 떠나자 아버지는 아이들을 외할머니에게 떠넘겼다.


남자들은 돈을 벌지 못해 가난해지면 여자들을 때리고 아이들을 내던진다. (127쪽)


외할머니가 쓰러져 외삼촌 네로 옮겨가고, 외숙모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큰집으로 쫓겨다니면서 우미와 우일은 남의 집에 얻어 사는 요령을 배웠다. 소리 내지 않는 법. 있어도 없는 것처럼 죽은 듯이 사는 법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마치 영역표시를 하는 들짐승처럼 여기저기 자기네 은밀한 흔적을 남겼다. 그건 일종의 놀이였다. 딱히 즐겁지 않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어 매일 습관처럼 하게 되는 놀이. 그렇게 눈치를 보며 살던 어느 날,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아버지를 따라 남매는 셋방살이를 시작한다.


셋방살이라고는 해도 친척집에 얹혀사는 것보다야 제 식구끼리 살 부비며 사는 것이 낫다. 이 익숙한 편견을 따라 마땅히 더 나은 삶을 남매에게 주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 이 불안한 이물감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을 텐데,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새엄마는 나쁜 어른이 아니고 우미와 우일이도 나쁜 아이들이 아니지만 그뿐이다. 나쁠 것 없던 새엄마는 곧 떠나버리고, 같은 집 다른 방에 세 들어 사는 다른 사람들도 나쁠 것 없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은 나쁠 것 없는 수많은 타인의 무신경함으로 굴러간다. 그런 세상에서 우미와 우일이 무언가 남다른 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다. 아버지란 사람을 무작정 따라왔지만 남매의 삶은 이전에 비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한편 함께 세 들어 사는 화물 트럭 운전사 이씨 아저씨에겐 키우는 새가 한 마리 있다. 새집 속의 새는 처량하다. 날아야 할 때 날 수 없고, 울어야 할 때 울 수 없기 때문에. 그럼에도 날개와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이씨 아저씨는 키우는 새를 마누라라 소개하며 익살을 부린다.


내가 없을 땐 외로워서 자꾸 울어대니까 새집에 검정 보자기를 덮어준단다. 그러면 밤인 줄 알고 언제까지나 잠을 자지. (37쪽)
새장 안에는 소꿉놀이처럼 앙증맞게 조그만 좁쌀통과 야채통, 물통 따위가 있었다. 거울도 있었다.
친구하라고 놓아준 거야. 제 동무인 줄 알거든.
새는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부리로 쪼고 날개를 퍼덕이며 수선을 떨었다.
바보 새야.
내가 말했다.
(36쪽)


외로울까 봐 검정 보자기를 덮어 죽은 듯 있게 해주는 것이 배려인 새장 속에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친구라 착각하도록 기획된 한 뼘짜리 세계 안에서, 새는 끝끝내 살아 있다. 우미는 그런 새를 보고 바보라 말하지만, 얼마나 비참한지 가늠도 안 되는 이 남매의 인생도 어쩌면 새장 속 새의 모습을 닮았다. 이것은 그저 지독한 불운이 초래한 결과인가.


비행기가 떨어졌을 때 나는 태어났다. 아버지는 꽃을 기르고 있었다. 그해 꽃값이 좋았다. 시든 꽃들도 비싼 값에 팔렸다. 온 나라 방방곡곡이 꽃에 뒤덮이고 아버지는 돈을 크게 벌었다. 막 태어난 나는 예쁜 요람을 갖게 되었다. 꽃장수는 떼죽음이 있어야 돈을 번다고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148쪽)


우미에게도 행복한 시기가 있었다. 그 행복은 타인의 죽음에 빚지고 있다. 비행기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태어난 우미가 예쁜 요람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꽃장사를 하던 아버지가 큰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불행이 당신의 수입으로 이어지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바람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행복의 한 조각을 움켜쥘 수 있었던 우미를 보면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역설을 읽는다. 죽은 자를 위한 꽃이 산 자를 위한 돈으로 바뀌던 시간에 아버지는 고인을 애도할 겨를이나 있었을까. 삭막하지만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겐 돈이 사람보다 먼저다. "꽃장수는 떼죽음이 있어야 돈을 번다"며 아쉬워하던 소설 속 아버지는 분명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아버지조차도 집을 나가버린 셋방에 어린 남매만 남아 간신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남매는 앞으로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집을 나간 김씨 아저씨를 향해 퍼붓는 안집 할머니의 무력한 악다구니도, 연숙 아줌마의 방에서 들리는 길고 긴 기도 소리와 온 집 안을 축축이 적시는 가늘고 검질긴 아줌마의 울음소리도…… (154쪽)

옆 셋방 식구들의 사정도 크게 다를 것 없지만 어린 남매에게 마음이 더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들의 삶을 단지 소설 속 인물의 서사로 읽을 수 없는 이유는 ―작가 본인이 경험담으로 밝혔듯― 이런 아이들이 실제로 도처에 방치된 채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검은 천으로 덮은 새장 속의 새처럼,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어딘가에 숨죽여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이 존재하는 이상 이 이야기는 끝까지 허구일 수 없다. 소설의 결말 이후 이어질 우미와 우일이의 삶이 자못 궁금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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