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상영작 다섯 편에 대한 짤막한 리뷰

by 달리

(순서는 개봉 날짜순입니다.)


1. 팀 밀러,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Terminator: Dark Fate>, 2019

터미네이터 1, 2의 감독이었던 제임스 카메론이 제작을 맡아 개봉 전부터 기대를 불러 모은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감독이 바뀐 뒤 혹평에 시달렸던 터미네이터 3, 4, 5편의 설정들을 무시한 채 2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다. 그러나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다루는 세계관 자체가 매번 타임머신으로 재탄생하는 평행 우주를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번 이야기가 2편에서 이어져 오든, 5편에서 이어져 오든 큰 의미는 없게 느껴진다. 그저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더불어 린다 해밀턴이 흘러간 세월과 함께 그야말로 화려하게 귀환했다는 것 정도가 반갑게 느껴질 뿐.


아쉬운 점도 있다. 터미네이터의 시그니처 배우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극의 전개가 너무 처지는 점, 시대 흐름을 반영하기 위해 미국과 멕시코 국경 부근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할애한 나머지 작품의 오락성이 전작들에 못 미친 점, 그리고 무엇보다 터미네이터가 존 코너를 죽이는 임무를 완수한 뒤에 스스로 인간적인 특징들을 갖추어나가게 되었다는 다소 뜬금없는 가정은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몇 가지 아쉬운 점에도 이 영화를 강력하게 추천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역시 맥켄지 데이비스의 액션이다. 린다 해밀턴이 등장하는 시퀀스도 물론 볼만하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맥켄지 데이비스의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다리로 악역을 패대기치는 장면에서 오는 타격감이다. 단언컨대 전작들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쾌감이다.




2. 크리스 벅, 제니퍼 리, <겨울왕국 2Frozen 2>, 2019

세계적 규모의 히트를 기록한 전편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속편, <겨울왕국 2>가 개봉했다. 폭발적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전작에서 엘사와 안나가 아름답고 예쁜 자매로 그려졌다면, 이번에는 보다 성숙하고 듬직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엘사가 진실을 찾기 위해 바다를 건너갈 때 물속의 말과 홀로 싸워 끝끝내 길들이고 마는 장면은 이 영화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캐릭터 얘기를 하자면 많은 관객들의 웃음 버튼과 눈물샘을 동시에 자극한 올라프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사실 올라프의 캐릭터 디자인이 그리 훌륭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선 예쁘지가 않고, 어색하며, 어설프기까지 하다. 나는 올라프를 전편에서 홀로 붕 뜬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올라프의 테마곡 'When I Am Older'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올라프 캐릭터의 주재료는 그 모든 어설픔과 어색함의 바탕에 깔린 함박눈 같은 천진함이다. <겨울왕국 2>에서 나오는 음악이 전편에서 히트 친 음악들에 비해 임팩트가 약하다는 주장이 지배적인데, (물론 사실이 그렇기도 하지만) 나는 엉뚱하게도 이 노래에 꽂혀 그 주장들에 반기를 들고 싶었다. 느낌은 다르지만 <코코>의 엔딩 시퀀스에 나왔던 'Remember me'에서 느꼈던 감정이 추억처럼 올라와 반가웠다. 가사와 멜로디, 천진난만한 올라프의 모습까지 모두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노래다. 아래에 노랫말을 옮겨 적는다.


This will all make sense when I am older 어른이 되면 이 모든 게 말이 되겠지
Someday I will see that this makes sense 언젠가는 이해될 날이 올 거야
One day when I’m old and wise 어느 날 내가 나이 들고 똑똑해져서
I’ll think back and realize 다시 생각해보면 알게 되겠지
That these were all completely normal events 이 모든 게 아주 평범한 일이었다는 것

I’ll have all the answers when I’m older 어른이 되면 모두 알게 되겠지
Like why we’re in this dark, enchanted wood 우리가 왜 이런 어두운 마법의 숲 속에 있는지
I know in a couple years 몇 년만 지나도 이런 건
These will seem like childish fears 애들이나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일걸
And so I know this isn’t bad 그래서 난 이게 싫지 않아
It’s good 괜찮아

Growing up means adapting 성장한다는 건 적응한다는 뜻이지
Puzzling out your world and your place 너의 세상과 위치에 맞춰가는 것
When I’m more mature 내가 더 성숙하면
I’ll feel totally secure 완전히 안전하다고 느끼겠지
Being watched by something with a creepy creepy face 엄청 무섭고 소름 끼치는 얼굴이 나를 쳐다보더라도

See, that will all make sense when I am older 봐봐, 어른이 되면 이 모든 게 말이 될 거야
So, there’s no need to be terrified or tense 그러니 겁먹거나 긴장할 필요 없어
I’ll just dream about a time 난 그냥 꿈을 꿀 거야
When I’m in my agéd prime 내 나이 한창일 때를
’Cause when you’re older 왜냐면 네가 나이 들면
Absolutely everything makes sense 모든 게 완벽하게 말이 될 테니까

영화 <겨울왕국 2>, 「When I Am Older」




3. 라이언 존슨, <나이브스 아웃Knives Out>, 2019

영미권의 고전 후더닛 장르문학을 영화적으로 탄탄하게 계승한 작품이다. 다수의 용의자, 치밀한 복선, 인물 간 얽히고설킨 사연들, 너무나 섹시한 탐정,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음에도 결말부에 드라마틱하게 폭로되는 범죄의 막전막후 이야기 등은 이 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굳건히 쌓아 올린다. 모든 장면들이 대단히 클리셰적이지만, 바로 그걸 기대하는 관객들을 모아놓고 영화 <나이브스 아웃>은 한바탕 쇼를 펼친다.


이 영화가 훌륭한 점은 또 있다. 오늘날 난민 문제에 대처하는 미국의 제도적 현실과 불법이민 소수자를 대하는 미국인의 양가적인 태도를 매우 정교하고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는 점, 장르 특성상 다룰 수밖에 없는 살인이라는 소재를 인간과 사랑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따뜻하게 풀어냈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주요 인물들 하나하나가 미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그룹의 핵심 정체성을 폭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는 물론 현시점의 한국에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지닌다.




4. 제임스 맨골드, <포드 v 페라리FORD v FERRARI>, 2019

<포드 v 페라리>는 시놉시스만 읽어봐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로 느껴지지만, 영화를 보면 예상과 다른 층위의 서스펜스를 경험할 수 있다. 영화는 경직된 기업 수뇌부의 논리에 굴하지 않는 스페셜리스트의 거침없는 질주를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외부와 단절된 차 안은, 한심한 기업관료들의 압박보다 더한 압력으로 인물들을 시시각각 숨 막히게 만드는 밀폐공간이다. 이 외로운 공간에서 켄 마일스를 연기한 크리스찬 베일은 아슬아슬한 곡예를 선보이며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가깝게는 <위플래쉬>, 조금 멀게는 <블랙 스완>과 같은 작품에서 보았던 광기가 <포드 v 페라리>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이 영화가 스릴 넘치는 이유는 레이싱의 속도감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영화들에서 스릴은 언제나 맹목적인 주인공의 광기가 임계점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찾아온다. 인간이 어떤 경우에 한계를 넘어 극한으로 내몰리는지, 그것이 자기 내면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에서 비롯되는 경우에는 어떤 파국으로 이어지는지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눈을 뗄 수 없다.




5. 이해준, 김병서, <백두산>, 2019

백두산 화산 폭발로 인한 최악의 재난 상황을 표현했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책임한 면면들이 초단위로 발에 차이는 작품이다. 스케일은 다르지만 영화 <아마겟돈>의 재난 설정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까지 그대로 가져왔음에도 방향은 정반대다. <아마겟돈>의 작전팀은 겉으로 형편없어 보이지만 임무 수행에 있어서는 최고의 전문가들인데 비해 <백두산>의 하정우와 그가 이끄는 팀원들은 그냥 다 영구들이다. 엄청나게 간단한 한 장 짜리 광산 지도 하나도 외우질 못해 길을 잃는 미아들을 데리고 유례없는 화산 폭발을 막아야 하는 것.


이병헌과의 파트너쉽(또는 브로맨스)도 아쉽기만 하다. 적대적 체제 속 두 인물 간 호흡을 다룬 버디무비 몇 편을 떠올려보자. <공작>과 <밀정>은 훌륭한 첩보영화였고 <공조>와 <강철비>는 적어도 자기가 뭘 하는지 정도는 알고 포인트를 살린 작품이었다. <용의자>나 <의형제>는 물론 시시했지만 벌어진 사건을 아무 개연성도 없이 대충 봉합하고 마무리짓는 무책임한 영화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 <백두산>은 전역을 하루 앞둔 무능한 국군 대위가, 백두산 주변 지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잘 될 거라는 순진한 믿음 하나만 가지고 부하들과 함께 투입되어, 북한 요원과 티격태격 귀엽게 다투면서 할 거 다 하다가, 어느덧 저절로 백두산에 도착해 단둘이서 문제를 해결하고, 그 짧은 시간에 갑자기 전우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서는 눈물의 이별을 한다. 관객은 쟤들이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진다.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멜로드라마 공식을 따른 것뿐.


더 큰 문제는 영화가 이걸 죄다 유머로 소비한다는 점이다. 영화가 안 웃기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일종의 재난SF영화로서 장르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을 성실히 시뮬레이션하고 묘사하기보다, 매번 어디서 본듯한 진부한 웃음으로 모든 걸 대충 무마하려 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길을 잃은 건 극 중 하정우 캐릭터뿐만이 아니다. 영화 자체가 자기 장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못해 아예 없어서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폭발하는 기체에서 겨우 탈출하던 인물들이 다음 쇼트에서 족히 10m는 떨어진 자리에 순간이동하거나, 위급한 순간에 주인공을 차에 태우려고 운전석 문을 열어줬는데 다음 쇼트에서 인공이 조수석으로 타는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정교하지 못한 CG는 덤이다. 뻔하디 뻔한 상업영화라지만 그래도 260억이 투입된 초대형 오락기인데 이보다는 더 나아야 하지 않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간이 예술로 성장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