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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pr 05. 2020

기대할만한 복수극

모완일 연출, 주현 각본, <부부의 세계>, 2020.03-

* 스포일러 : 중간



이 글을 쓰는 시점을 기준으로 4까지 방영된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흔하디 흔한 '배우자의 불륜'이라는 소재를 배신당한 아내의 관점에서 참신하게 풀어낸다. 물론 이 같은 설정이나 상상력 자체가 그리 대단하게 참신한 건 아니다. 원작도 따로 있고. 하지만 모노아모리 세계관에서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게 된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진부한 로맨스물이나, 이른바 '막장' 드라마 연속극에서 에피소드 형식으로 가볍게 다뤘던 불륜 클리셰들에 비하면, 이번 시도는 충분히 참신하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참신함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임팩트는 역시 힘 있는 여성을 원톱으로 세우는 것만으로 극의 장르와 서스펜스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부부의 세계>는 전적으로 김희애의 드라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대다수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원톱 인물의 성별을 바꾸는 것만으로 스토리텔링이 이만큼 참신해질 수 있다는 건, 바꿔 말하면 지금까지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는 영역의 거의 절반을 놓치고 지나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영역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며, 당연히 최근 여성 배우 원톱의 영화가 스크린에서 점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다.


드라마는 1화부터 주인공 부부와 그 주변 인물 간 관계의 추악한 이면을 드러낸다. 가정의학과 전문의이면서 병원 부원장인 지선우(김희애)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음을 직감한다. 곧이어 남편과 남편의 친구들, 심지어 자신의 동료까지 모두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를 기만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믿어왔던 사람들로부터 일시에 팽개쳐진 지옥 같은 상황에서 남은 것은 그들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는 일뿐이다. 연출도 알고, 각본도 알고, 시청자도 알지만 드라마 속 악한 등장인물들만 모르는 복수가 서서히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그 복수의 정점에는 남편 이태오(박해준)가 있다.


잘 짜인 복수극을 보기란 안타깝게도 쉽지 않다. 악역의 문제는 아니다. 현실에 악인은 넘쳐나고, 그들을 모티브 삼아 창작해낼 수 있는 악역도 무궁무진하다. 문제는 그들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는 작업이다. 너무 많은 복수극이 악인을 맥없이 용서하거나 죽음으로 친절하게 인도한다. 훨씬 더 크고 질긴 고통을 겪어 마땅한 악인에게도 신속한 죽음을 허락하는 것이다. 이건 문제의 소지가 있다.


알다시피 현실에서는 아무리 극악무도한 사람이라도 인권을 갖는다. 한 사회의 윤리규범을 조롱하고 피해자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흉악범죄자를 끝끝내 살려두고 삼시세끼 밥까지 세금으로 먹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국가의 법치주의가 재소자 인권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에 대한 판단기준이 잘못됐다면 법을 정비해야 한다. 이것이 현대국가가 형법을 집행하는 방식이다. 범죄자 개인을 고문 끝에 죽여서 복수를 완성하는 합법적인 방법은 현실에 없다. 그런데 영화와 드라마에서까지 그러면 어떻게 될까. 답은 간단하다. 재미가 없다.


복수극이 재미있어지려면 온갖 인도적 관점이나 법치주의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합당한 복수라는 최종 목적지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 복수극의 카타르시스는 비극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그 비극의 원인제공자를 찾아 그에 맞는 책임을 지워야 비로소 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다. <부부의 세계>는 지선우에게 극도의 고통과 좌절을 안겨준 인물들에게, 그녀가 당한 만큼 돌려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 복수의 형태는 한순간 분노에 차서 저지르는 원초적 폭력이 아닌, 훨씬 더 잔혹하고 냉철하면서 처절한 방식이어야만 한다. 이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전개되는 분위기로 보아 뜨뜻미지근한 그저그런 복수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대할만한 복수극이다.


금자씨를 뛰어넘는, 차가운 복수를 상징하는 캐릭터가 나올 수 있을까. 뭐 그게 중요하겠냐마는. 소박한 기대 정도는 걸어봐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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