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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y 06. 2020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

유은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창비, 2005

* 쪽수: 184쪽



최근 『구름빵』, 『달샤베트』로 유명한 백희나 작가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을 받았습니다.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권위 있는 상인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 수상이라는군요.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백희나 작가는 최근까지 『구름빵』의 저작권 소송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수상으로 더 큰 위안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은 '말괄량이 삐삐' 캐릭터의 창작자로 널리 알려진 스웨덴 작가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동화책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흠모하는 한 소녀의 성장담이고요. 화려한 아이돌과 대규모 팬클럽이 붐비는 오늘날 한국에서 스웨덴 아동문학작가의 팬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주인공 소녀 '이비읍'이 90세가 넘은 스웨덴의 할머니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알게 된 건 2001년 4월의 일입니다. 엄마가 좋아하는 캐릭터인 말괄량이 삐삐를 도서관에서 찾아보다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책을 펼치고는 그 자리에서 흠뻑 빠져들었죠. 비읍이는 그렇게 린드그렌 선생님의 팬이 됩니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는 우상을 동경하는 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건 사실 그 사람의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함으로써 차츰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거니까요. 비읍이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린드그렌 선생님이라는 프레임을 씌우죠. 린드그렌 선생님이 쓴 동화책들이 비읍이에게는 경전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전거를 사기 위해 모으던 용돈을 선생님의 책을 사는데 쓰고, 틈만 나면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고, 언젠가 스웨덴으로 선생님을 만나러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스웨덴어를 배워 선생님의 책을 번역출간하겠다는 꿈을 품게 됩니다. 같은 반 장난꾸러기 친구 지호는 선생님의 동화 『에밀은 사고뭉치』 속 에밀이 되고, 엄마와 다투고 집을 나온 날에는 역시 선생님이 쓴 「펠레의 가출」 이야기를 떠올리죠. 그런 비읍이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시기는 린드그렌 선생님의 책을 싸게 구하기 위해 찾은 헌책방에서 '그러게 언니'를 만나면서부터입니다. (사실 책을 정말 소중히 여기는 비읍이같은 사람은 책값을 가지고 흥정을 하지는 않죠. 비읍이가 책을 싸게 구하려는 진짜 이유는 린드그렌 선생님을 만나러 갈 비행기 표값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비읍이의 얘기에 항상 "그러게." 하며 맞장구를 쳐주는 '그러게 언니'도 역시 린드그렌 선생님의 팬입니다. 동시에 멋진 어른이기도 하죠. 야기를 끝까지 읽고 나면 '그러게 언니'가 작가 본인의 분신같은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린드그렌 선생님 책을 읽으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예의'가 생긴다고 말하는 '그러게 언니'는 그 예의를 몸소 실천하며 어린 비읍이에게 훌륭한 모델이 되어줍니다. 엄마의 서운한 말과 행동 때문에 가출을 고민하는 비읍이에게 안전하게 집에 돌아갈 이유를 마련해주고, 일기에 린드그렌 선생님 얘기만 쓴다고 친구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온 비읍이에게 지혜가 담긴 조언을 건네고, 착한 일을 하지 않아 산타할아버지가 안 올 거라고 믿는 비읍이에게 아무리 착해도 산타의 선물을 받을 수 없는 가난한 어린이들에 대해 들려줍니다. 비읍이는 그렇게 가슴속 구슬을 하나하나 깨면서 성장해나가죠.


"언니, 내 마음에서 뭐가 깨지는 것 같아."
"우리 비읍이가 쑥쑥 크는구나. 가슴속 구슬이 그렇게 하나하나 깨져 나가면서 어른이 되는 거야."
"그럼 언니는 마음에 구슬이 하나도 없어?"
"아니, 다 깨지고 단단한 진짜배기 구슬만 남았지."

148쪽


이 둘의 관계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그러게 언니'가 멋진 어른의 훌륭한 모델일 뿐만 아니라 좋은 교사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독서지도가 막막하게만 느껴지는 어른들이라면 이 이야기 속 '그러게 언니'가 그야말로 모범적인 샘플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을 즐겨 읽고 소중히 하는 사람만이 공유하는 정서적 토대 위에서 둘이 함께 나누는 대화는,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값진 것들이 무엇인지 유감없이 보여주죠. '그러게 언니'의 말과 행동, 그리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비읍이의 생각 중에는 이른바 '명언'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정말 많아요. 그만큼 대화 주제도 넘쳐나죠. 제가 이 책을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강력히 추천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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