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쓰기와 읽기

새겨지지 않은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

by 달리

나는 다 쓴 글을 언제나 PC와 모바일로 여러 번 점검한다. 매체가 달라지면 글의 인상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좁다란 핸드폰 액정보다 24인치 모니터로 볼 때, 제아무리 넓은 모니터보다 종이책으로 볼 때 글이 더 잘 스며온다. 내용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글에 대한 호감도 자체가 달라진다. 같은 글이라도 서로 다른 매체에서 확인하고 퇴고하는 건 나의 오랜 습관이다. 종이로 출력해서 보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PC와 모바일에서 별도로 퇴고하는 정도는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에서 반드시 갖춰야 할 미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디지털 세계는 내게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지만, 도구적 편리함과 관계없이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닿는 것은 지나간 시절 묻혀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엔 아마추어 작가도 잘만 쓰면 얼마든지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주목을 받을 수 있지만, 글쓰기가 지식인의 전유물이던 시대에는 취미로 글을 써서 발표해도 크게 주목받기 어려웠다. 그러니 지역의 몇몇 문예 모임들에서 읽히다 그만 묻혀버린 글들 중에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글뿐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흔적도 없이 묻혀버린 수많은 가능성의 바다 위에 떠있는 평행우주다. 이런 생각을 하면 뭔가 비현실적이면서도 광막한 공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SF를 쓰는 사람들은 현실 세계를 규정하는 몇 가지 물리법칙을 토대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창조주와 유사한 존재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 또한 SF적인 측면이 있다. 생각해보라. 지금 내가 쓴 글을 당신이 읽고 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않나. 나는 어디에도 내손으로 글자를 새기지 않았지만 당신은 분명 내 메시지를 읽고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기술적으로 낱낱이 이해하는 건 전문가의 도움 없이 불가능할 텐데 그래도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다른 분야도 사정은 다 비슷해서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익숙한 수단의 세부사항에 별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 근데 이거 좀 기이하지 않나.


흔히 하드 SF로 분류되는 장르의 소설을 보면, 그 안에서 통용되는 물리적 규칙과 사고방식이 너무 말이 안 되고 낯설어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 세계를 사는 인물들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의 기술을 이용하여 온갖 서사를 쌓아나간다. 그들 관점에서 당연한 규칙과 사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해대는 순간 이야기가 늘어지기 때문에 인물들은 대체로 당연한 듯 그들의 일상을 영위한다. 독자는 소설 속 온갖 생소한 개념들을 오로지 그들의 맥락 속에서 짐작하고 파악해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도 그렇다. 내가 마구잡이로 배열한 데이터가 일정한 텍스트로 규격화되어 웹에 게시, 보존되고 누군가 그것을 임의의 장소에서 열람하기까지의 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렵지만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이용한다. 우리가 300년 전 이 세계에 도착했다면,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와 그 유통 시스템을 상상 속 외계인의 메시지 교환 방식과 구별할 수 있었을까. 어려웠을 것이다. 새겨지지 않은 글을 익숙하게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건, 그래서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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