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의 기준
누구에게나 객관적으로 좋은 글이 있을까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글에 기준을 세워 좋고 나쁜 정도를 판단하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만약 불가능하다면 좋은 글을 쓰겠다는 바람은 객관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한낱 공상에 불과한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좋은 글을 고르는 기준은 '재미'다. 그런데 어떤 글이 재미있는 글인가로 넘어가면 쉽게 결론 낼 수 없는 문제가 된다. 누구에게나 재미있는 글은 없으니까. 최근 읽은 것들 중에는 루이즈 페니의 미스터리와 테드 창의 SF 단편 몇 개, 그리고 마거릿 애트우드와 황정은, 배명훈의 장편이 재미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다. 근데 나는 저것들이 왜 재미있다고 느꼈을까.
재미있는 책의 한 가지 공통점은 더 읽고 싶다는 것이다. 한 챕터를 읽고 나니 다음 챕터가 궁금해 몇 장을 더 뒤적이다 수십 페이지가 넘어가는 일이 반복되면 그 책은 재미있는 책이다. 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짤막한 기사나 포스팅, 수필과 칼럼도 다 마찬가지다. 앞 몇 문장을 읽었는데 그 뒤로 홀리듯 빠져들어 끝까지 읽게 만드는 글이 재미있는 글이고, 재미있으면 좋은 글이다. 근데 그러면 재미있고 나쁜 글은 없는 걸까.
물론 있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그 안에 담고 있는 메시지가 약자를 조롱하거나, 혐오하거나, 폭력을 휘두른다면 나쁜 글이다. 근데 나는 이 말이 좀 이상하다. 그런 글은 그냥 재미가 없지 않나. 어떻게 재미있으면서 나쁜 글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기가 막히게 모순적인 글을 어딘가에서 보게 된다면 꼭 나에게 알려주면 좋겠다. 물론 그전에 나쁜 글을 재미있게 읽고 있는 자신이 어딘가 이상해진 건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테고.
말장난 같지만 조금만 더 이어가 보자. 재미없는데 좋은 글도 있을 수 있을까. 가능하다고 본다. 난해한 개념을 해설하는 글이 나에게 따분하게 읽힌다고 해서 그 유용성마저 부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다만 난 그런 글을 '개인적으로는' 좋은 글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필요한 글과 좋은 글은 다르다. 내 경우 좋은 글이란 SNS의 '좋아요 버튼' 같은 것이다. 즐겨찾기나 북마크 리스트 같은 곳에 따로 모아놓고 싶은 글이다. 당연히 내 취향이 절대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꼭 소설이나 이야기글일 필요는 없다. 눈물 나게 슬픈 글도 재미있을 수 있다. 현실의 고통을 진지하게 다룬 에세이도 재미있을 수 있다. 어려운 지식도서와 호흡이 긴 글도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다. 재미는 글을 몰입해서 읽게 해주는 요소일 뿐, 꼭 박장대소를 터뜨려야만 재미있는 건 아니다.
남들에게 지루하게(때로는 불쾌하게) 느껴지는 글이 내게 좋은 글인 경우도 많을 것이다. 박주영 판사의 『어떤 양형 이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아니 에르노의 『사건』, 록산 게이의 『헝거』, 앨리슨 벡델의 『펀 홈 - 가족 희비극』은 내 리스트의 최상위에 위치할 만큼 좋은 글들이지만 남들에게도 그런 건 아니다. 이런 취향의 차이는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결의 글을 만들어낸다. 수요자의 선호도나 소비자의 반응이 시장에 반영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런 수요자들 또한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닮은 글을 써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아름다운 글을 읽을 수 있는 건, 사실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다름'에 대한 낭만이 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개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똑같아 보이는 것도 그것이 서로 다른 개체인 이상 어느 극소한 단위에서 반드시 차이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개체들이 어울려 스며드는 과정이 충분히 반복되면 우리가 사는 세계도 점점 다채로운 색채로 물든다. 자연이 그렇고, 동물과 식물이 그렇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고, 한 사람의 내면도 그렇고, 글도 그렇다. 진정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탄생한다. 누구에게나 객관적으로 좋은 글이 필요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