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아마추어가 지켜야 할 원칙 중 거의 예외 없이 강조되는 것이 단문 쓰기이다. 문장의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서 가독성을 유지하는 건 프로 작가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아마추어는 되도록 단문 쓰기를 실천하라는 것. 글쓰기 고수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데에야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정보량이 같다면 문장의 길이는 짧고 간결할수록 좋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문장이 길어지더라도 오문이나 비문이 되지 않도록 다듬는 연습도 해봐야 글이 는다. 한두 문장 안에서 반복되거나 겹치는 어휘가 많아질수록 글이 어색해진다는 사실도 그런 문장을 직접 써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단문 쓰기는 분명 오독의 여지를 줄여주고 글을 산뜻하게 만들어주지만, 그렇게만 쓰인 글은 풍미가 없다. 글의 품격을 늘려주는 요인은 원칙적인 단문 쓰기가 아니라 깊고 섬세한 생각을 버무리는 언어의 결에 있다. 모든 생각을 단문에 구겨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단문 쓰기보다 중요한 건 내 사고와 문장의 결을 다듬는 것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에서 지켜야 할 원칙이라며 소개되는 것들 중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은 없다. 단문 쓰기, 명확한 개념과 어휘 사용하기, 번역투 문장 남용하지 않기, 문장 성분 간 호응관계를 분명히 하기, 불필요한 현학적 표현 자제하기 등 다 좋은 얘기지만, 참고는 하되 글은 되도록 아무렇게나 쓰기를 권한다. 열심히 쓰고 읽다 보면 문장은 자연스럽게 본인 스타일로 다듬어진다.
아니, 어쩌면 다듬어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페미니즘 문학비평의 시초로 알려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1929), 난해한 문장으로 가득 찬 주나 반스의 『나이트우드』(1936), 당대 사회의 풍속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보들레르의 시집, 사랑과 연애에 관한 알랭 드 보통의 모호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은 일반적인 글쓰기의 원칙에 얽매였다면 절대 나올 수 없었을 작품들이다. 한국인의 강박적이라 해도 좋을 간결체 선호 경향에 비추어보면 더 그렇다. 아마 보들레르가 지금의 한국에서 한국어로 시를 써서 발표했다면 절대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문장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읽히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럼 프랑스인들은 특유의 똘레랑스로 보들레르의 문장들을 포용한 것일까? 그럴 리가.
그들은 그저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을 사랑한 것뿐이다. 어떤 생각과 이미지의 파편들은 어지럽고 난해한 문장을 통해서만 겨우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즉, 가독성 높은 깨끗하고 정갈한 글만 읽으려 할 때는 보이지 않는 미가 있다. 이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주변의 온갖 비루하고 꺼림칙한 것들과도 함께 걸을 수 있어야만 한다. 길고 지루한 숨을 지닌 문장, 글쓴이 자신마저 무슨 뜻인지 몰라 횡설수설하는 문장의 수면 위로 간간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그래서 모두 소중하다. 그러니 누가 뭐라든 내 멋대로, 내 스타일로 쓸 것. 실은 그것이 제1의 원칙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