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와 흉내내기

모방은 기술이다

by 달리

나는 필사를 하지 않는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필사를 통해 글쓰기 연습 효과를 톡톡히 보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아무래도 흥미가 없다.


사람들이 필사를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문체를 가끔 흉내 내어 글을 쓰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한 작가의 글을 충분히 많이 읽으면 특유의 어휘와 문체가 빈번하게 사용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고정 독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게 되면 곧 그의 '스타일'이 된다. 다수의 글이 유통되면서 작가의 스타일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면 자연히 추종자가 생기고, 누군가는 다분히 노골적으로 그의 스타일을 모방한다. 필사는 그런 모방의 가장 치밀한 형태가 아닐까. 문장을 써 내려가면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효과도 있을 듯하고.


최근 한 포털 사이트에서 이런 내용의 댓글을 보았다.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대중에게 미치는 가장 큰 해악은 영화에 대해 뭣도 모르는 평범한 관객들마저 흉내 내서 아는 척하기 딱 좋게 글을 쓴다는 것이다.' 포털 사이트 댓글창이 일부 몰지각한 이들을 과대표하는 통로로 기능한다는 것쯤이야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저열하다. 어째서 평범한 관객은 영화에 대해 아는 척하면 안 되나. 나는 이동진 평론가의 유려한 언어를 아주 좋아하지만 의식적으로 그를 모방하려 시도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다는 건 영화리뷰 몇 개만 검색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좋은 현상이다. 평범한 관객들이 이동진 평론가의 언어를 모방하여 리뷰를 쓰는 게 도대체 이 사회에 무슨 해악을 미친다는 건가.


내가 안 쓰는 어휘와 문장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프로의 글을 모방함으로써 그것들이 사용되는 구조와 맥락을 익히는 것은 글을 발전시키는 데 매우 유용한 전략이다. 모방은 표절이 아니다. 남의 문장이나 문단을 자기가 쓴 것인 양 통째로 훔쳐오는 표절과 달리 모방은 닮고자 하는 작가의 어휘와 문체를 흉내 내는 것이다. 만약 문장을 통째로 갖다 쓰고 싶으면 인용을 하면 된다. 요컨대 모방은 그 자체로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오히려 적극 권장되어야 한다.


문제의 댓글 작성자는 '일부 ―그러나 꽤 많은― 관객들이 자기네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느라 이동진의 영화평론을 몇 개 주워 읽고는 잘 알지도 못하는 개념과 어휘를 동원해서 글을 싸지르고 있다'며 조롱했다. 백번 양보해서 그게 맞는 말이라고 해도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런 일부 영화팬들의 리뷰에 묻어나는 지적 허영심이 사회에 해를 끼쳐봐야 얼마나 끼치겠는가. 지적 허영심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화감상문을 쓰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면 오히려 문화예술산업의 부흥을 위해 사회적으로 장려되어야 할 일이 아닐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알게 모르게 타인의 문장을 흉내 낸다. 문제는 그런 글쓰기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고 냉소하는 비열한 눈과 혀들이다. 되도록 신경 쓰지 말고 꾸준히 모방할 것을 권한다. 좋아하는 작가, 기자, 논객, 평론가의 글을 주기적으로 읽는 것이 모방에 큰 도움이 된다. 나는 시사인의 천관율 기자와 한국일보의 최윤필 기자, SF작가 듀나의 글을 특히 즐겨 읽는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신, 본인을 이승의견가라 소개하던 박성호 님의 재치 넘치던 글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언젠가 쓰고 싶은 글의 지향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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