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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y 09. 2017

학교를 싫어하는 아이

같은 높이에서 눈맞춤하기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다닐까. 우린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심해진다. 아이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학교 열심히 다니라고 말한다. 왜? 무엇을 위해서?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는 줄 아니? 세상이 아주 만만해 보이지? 어디 어른 돼봐라."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리고 맞는 말이다. 평생을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다. 그래도 아이들은 억울한 마음이 남는다.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일인데, 그저 어른들이 그래 왔다는 이유만으로 10년도 넘게 학교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는 세상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기 싫은 일에 이리도 지독하게 매여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든 현실은 어린 나이에 너무 가혹하게 느껴진다.


'백번 양보해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말을 순순히 인정한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도대체 왜 나는 하기 싫은 일만 해야 할까. 그렇게 가기 싫은 학교지만, 학교를 가지 않는다고 상상하면 딱히 할 일도 없다. 내 삶은 왜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학교와 공부로만 가득 차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무언가 크게 잘못된 느낌이다.'


이런 얘길 하면 어른들은, 친구도 있고 선생님도 있는데 학교가 그렇게 싫다고만 하는 건 과장 아니냐고 말한다. 물론 학교에는 재미있는 일이 많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마냥 좋아하기는 어렵다. 아이는 학교가 고통으로 가득 찬 공간이라서 싫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가 워낙 긴 인내의 과정이라 그 안에서 겪는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이 그다지 큰 위안이 되지 못한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학교는 긴 시간 동안 아이의 호기심을 통제하며, 규칙과 규범 아래 일상의 즐거움을 얼마간 유예하도록 훈련시킨다. 우리는 아이에게 이 모든 상황이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멋진 사람들 화려한 모습만 보지 말고, 거기까지 가는데 들인 노력도 좀 생각해 봐. 힘들다고 공부 안 하고 노력도 안 하면 아무것도 못 되는 거야."


간절한 꿈과 희망을 이루어내려면 그에 따르는 고통을 참고 견뎌내야 한다. 빛나는 성취의 이면에는 언제나 길고 괴로운 인고의 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아이들의 학창 시절도 그런 가치 있는 인고의 시간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라고 하면 되는 걸까.


'화려한 성공 뒤에 가려진 노력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놓인 상황은 다르다. 나는 나의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저 어찌 될지 모를 미래를 가장 안정적인 방법으로, 어른들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정해놓은 방식으로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 그마저도 확신이 없다. 확신 없는 오늘이 수없이 모여 만들어낸 미래가 행복하지 않다면, 나는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나도 내가 정한 목표를 위해 열심히 달려보고 싶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내 미래를 만들고 싶다.'


누군가 그랬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어느 훗날에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학교 성적이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그럴듯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공부의 의미를 지나치게 제한적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이유는 그저 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하나씩 알기 위해서다. 우리는 세상을 반듯하게 보고, 생각하고, 깊이 느끼고, 마음을 넓히려고 공부한다.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여행과, 놀이터에서 친구와 함께 하는 모래놀이와, 학교 교실에서 하는 여러 가지 학습활동이 다 같은 공부가 되는 것이다. 즉 공부는 그 자체로 즐거움이며 행복이어야 한다. 공부를 다른 어떤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쉬운 이유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꿈과 희망, 고민과 노력,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외로움을 반듯하고 맑은 눈길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따뜻하게 대답해주어야 한다. 각자의 길을 각자의 속도로 가면 된다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잘하겠지만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달라고.



"지금 힘들다고 하는 거 어른 되면 다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힘든 걸 안 겪어봐서 그렇지. 내가 그 힘든 걸 먼저 다 겪어봤으니 이 고생하면서도 너 뒷바라지하는 거 아니니. 지금 힘들어도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해야 나중에 후회 안 한다."


맞는 말이고, 아이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안다고 해서 지금 힘들다는 그 느낌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식으로 자제력과 인내심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다소 지나친 요구가 아닐까.


'나를 위해, 나 잘 되라고, 나 하나만 바라보는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받으면서 고작 학교 다니는 일 가지고 힘들다 우는 소리를 하긴 미안하고 민망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에겐 지금 이 순간 내가 힘들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게 필요한 건 단지 위로와 공감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만큼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 힘듦의 정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중요한 것은 힘들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것. 아이의 경우는 더 그렇다. 어른이 보기에 웃음 나올 정도로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고민이라도 아이가 진지하게 말하면 반드시 그에 맞는 진지한 태도로 응해야 한다. 자신의 경험을 잣대삼아 남의 고민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 어른이 어른으로서 갖추어야 할 제1의 조건이다.


어른들에게, 아이가 조금 답답하더라도 쉬엄쉬엄 돌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호언장담은 못하겠으나, 돌아가는 긴 시간 동안 나누는 대화와 위로는 둘 사이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신뢰를 만들어줄 테니 말이다.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을 앞에 두고 우리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정답은 없다. 다만 말도 안 되는 소리,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 윽박질러 말문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올해 만나 상담한 부모님들 대부분이 집에서 아이들이 말을 안 하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말문을 닫아버린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부모의 거친 태도가 한몫했을 가능성이 크다. 진정한 위로의 대화는 같은 높이의 눈맞춤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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