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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쓰지 않은 글을 내가 쓸 수 있을까

by 달리

최근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를 깊이 몰입해서 보았다. 광신도 집단 '맨슨 패밀리'가 저지른 희대의 살인사건을 다루는 이 영화의 방식은 기존 장르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던 류의 것이었다. 당대 미국인들은 물론,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유명한 사건에 관한 영화인 만큼 그 사건 자체가 전면 핵심부에 배치될 것으로 짐작했다. 초반에 터뜨리든지, 아니면 서서히 서스펜스를 쌓아 올려 그 힘으로 후반에 폭발시키든지. 그런데 이 영화는 밋밋한 드라마의 작법과 옛 할리우드에 대한 오마주로 거의 2시간가량을 써버리고는 결말부에 갑자기 슬래셔로 장르 반전을 시도한다. 심지어 그 결말도 실제 일어났던 사건과는 다르다. 아마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었던 살인 사건에 대한 타란티노 감독 나름대로의 추모―또는 복수―였을 것이다. 어쨌든 끝까지 보면 약간 멍해지는 영화인데, 신기하리만치 눈을 뗄 수 없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다른 작품과 차별화될 수 있는 것은 대다수 관객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은 연출의 공이 크다. 영화의 소재나 발상 자체는 그리 참신하다고 할 게 없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의 노련함과 독특함에서 거장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를 갈망한다.


물론 진부하고 뻔한 사랑이야기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리메이크 버전만 평생 읽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이야기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에 어긋난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본능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 그런 참신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지금 가능한 한 가장 참신하다고 느껴지는 글감을 떠올려보라.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죄다 뻔한 것들뿐이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내가 글로 쓰려는 모든 아이템은 역사 속 누군가에 의해 먼저 쓰였을 가능성이 절대적으로 높다. 하지만 그것이 곧 내 글의 무용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소재가 같아도, 장르가 같아도, 심지어 내용이 같아도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글을 펼쳐나갈 수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타인의 꿈속에 들어가 무의식을 조작하는 이야기 하면 보통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와 유사한 아이템을 다룬 드라마 예고편을 보았다. 바로 JTBC 드라마 <쌍갑포차>. 신비한 포차 이모와 알바생이 손님의 꿈에 들어가 한을 풀어준다는 내용이다. 둘 모두 타인의 꿈에 들어가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이 두 작품이 같은 장르에 속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헛소리가 되고 만다. 즉, 이미 누군가가 써서 유명해진 아이템이라도 스토리텔링의 세부사항으로 가면 거의 무한한 차별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각본이나 소설뿐만 아니라 우리네 일상 속에서 그려지는 모든 풍경과 에세이가 이렇듯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러니 새롭고 신선한 글쓰기 아이템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너무 좌절하지 마시길. 당신 자신이 이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글쓰기 아이템이니 말이다.


스스로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든 말든 일단 쓰고 보면 좋겠다. 당신의 머릿속에 혼탁하게 부유하는 생각들이 전부 훌륭한 글감이다. 그중 명료하게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는 아이디어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기를 마냥 기대하는 것도 바보 같은 짓 아닌가. 쓰면서 찾는 게 가장 쉽고 빠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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