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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y 20. 2020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야기

배유안, 『뺑덕』, 창비, 2014

* 쪽수: 212쪽



배유안의 장편소설 뺑덕은 조선시대에 쓰인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 「심청전」의 스핀오프입니다.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병덕(뺑덕어미의 아들)을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1인칭 화자로 삼았다는 점에서 참신하죠. 작가는 청소년들이 평범하거나 미숙한 부모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삶을 더욱 튼튼히 세우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원작 「심청전」에서 매우 탐욕스럽게 그려지는 뺑덕어미와 같은 인물을 어머니로 둔 소년이 필요했던 거죠.


소설은 병덕이 집을 나오게 되는 사연으로 시작합니다. 병덕은 정실부인의 불임으로 대신 아기를 낳아준 여자의 아들이에요. 병덕이 나고 몇 해 뒤에 불임인 줄로만 알았던 정실부인에게서 동생 윤덕이 태어나고, 병덕은 단번에 찬밥 신세가 되고 말죠. 어머니의 차별적 언행으로 생모의 존재를 알게 된 병덕은 집을 나설 결심을 하게 됩니다.


소설 속에서 병덕의 어머니는 둘입니다. 하나는 병덕을 기른 양반댁의 정실부인이고, 다른 하나는 병덕을 낳은 생모입니다. 병덕은 전자를 '어머니'라 부르고, 후자를 '어미'라 부르죠. 소설 속 맥락에서 '어머니'는 사회학적 의미를 띠고, '어미'는 생물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포유류의 '어미'는 사람의 '어머니'가 될 수 없습니다. 병덕은 어릴 적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집에서 부엌데기 취급을 받던 여인이 자신의 생모임을 알게 되지만 그에게 어머니는 여전히 자신을 기른 양반댁 정실부인을 의미했죠. 그런 어머니에게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집을 나온 병덕은 자신을 버린 생모를 찾아가는 대신 뱃사람들이 머무는 바닷가로 향합니다.


바다에서 뱃일과 물질을 배우던 중 가막동 친구 강재가 뱃사람 무리에 합류합니다. 가막동은 병덕이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의 이름이죠. 그곳에서 병덕은 '뺑덕'이고, 강재는 '깡치'였어요. 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주먹다툼을 하던 사이지만, 함께 뱃일을 배우며 서로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시집간 누나 집에서 눈치 보며 얹혀살던 강재는 논 한 마지기 값을 누나에게 벌어다 주기 위해 바다에 왔습니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병덕은 강재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렴풋이 부러워하는 듯 보이기도 하죠. 강재도 병덕에게 부러운  있습니다. 병덕의 집안 사정을 훤히 아는 강재는 한 때 친구를 '씨받이 자식', '첩년 아들'로 부르며 시비를 걸었지만, 실은 이러나저러나 엄마가 살아 계신 병덕이 부러웠던 겁니다. 엄마 얘기만 꺼내면 주먹을 내지르는 병덕을 알면서도 끝내 "그래도 엄마잖아"하는 강재의 모습에서 그런 애틋한 부러움을 읽을 수 있죠.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물질을 해서 얻은 조개를 불판에 올려놓고 구워 먹던 병덕과 강재는 그 속에서 진주를 발견합니다. 진주를 팔아서 번 돈을 반 갈라 누나에게 논 한 마지기 값을 벌어다 줄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하던 강재는, 누나를 만나러 가기 하루 전 날 나간 바다에서 파도에 휩쓸려 물에 빠지고 말죠. 친구의 죽음에 망연자실하던 병덕은 강재를 대신해 누나에게 돈을 전달합니다. 병덕은 강재가 그토록 끔찍이 생각했던 누나를 만나고 오는 길에 어미 생각에 잠기고, 이내 어미를 찾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어미가 주막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마을은 도화동입니다. 아기를 낳아주고도 행실이 나빠 쫓겨갔다는 어미는 그곳에서 '뺑덕어미'라 불리며 아등바등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쫓겨간 마을에서조차 자신의 이름을 딴 호칭으로 불리는 어미. 하지만 보드랍고 따뜻한 전형적인 어머니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병덕의 눈에 그녀악착같은 삶은 그저 한심스럽게만 보입니다. 뺑덕어미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병덕은 죽은 친구 강재의 이름을 빌려 당분간 주막에서 생활하기로 하죠.


도화동 주막에 머무는 동안 병덕은 청이를 만나게 됩니다. 담백하고 수더분한 청이는 눈이 먼 아버지를 봉양하며 살고 있죠. 어느 날 물에 빠진 아버지 심 봉사는 공양미 삼백 석이면 눈을 뜰 수 있다는 스님의 제안에 덜컥 시주를 약속하고, 이 많은 쌀을 구할 방법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청이가 뱃사람들의 제물로 팔려 갑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이야기 전개가 소설 뺑덕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이 장면 이후 병덕이 제 어미를 대하는 태도가 극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원작 「심청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뺑덕어미는 청이가 팔려간 직후 심 봉사를 찾아가 극진히 보살핍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뺑덕어미를 두고 심 봉사가 딸을 판 대가로 얻은 재산을 노리는 거라며 수군거리죠. 이를 알게 된 뺑덕어미는 주막으로 돌아와 분통을 터뜨립니다. 아들을 낳고 쫓겨난 뒤로 몇 번의 재가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끝났던 책임은 그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뺑덕어미에게만 손가락질하며 행실이 나쁘다는 등의 무책임한 소문을 퍼뜨렸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뺑덕어미의 몫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소설은 뺑덕어미의 행동을 변호하지는 않습니다. 알고 보니 딸을 잃은 심 봉사의 처지에 뺑덕어미의 진심이 움직인 것이라며 그녀에 대한 평가를 억지로 뒤집으려 하지 않아요. 소설 뺑덕에서 뺑덕어미는 그저 조금 더 잘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심 봉사에게 접근한 의도가 순수했든 그렇지 못했든, 뺑덕어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그녀 자신이 질 것이므로 따로 변호를 받을 이유가 없는 겁니다. 소설 후반부에 심 봉사를 찾아가기로 한 뺑덕어미의 숨은 의도나 속사정이 소개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겠죠.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 압력이 만연했던 시기에 모든 책임의 굴레를 그녀에게만 씌우려 했던 그 폭력적 시선에 맞추어 이야기를 각색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소설은 아들 병덕의 시선을 극적으로 전환시켜 제 어미의 삶을 직시하게 하는 방법을 택하죠.


나를 노려보는 어미의 눈에 분노보다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패악도 악다구니도 부릴 수 없는 눈, 그 눈에 천천히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가여운 눈이었다. 사방에서 비난당하는 사람의 방어 본능과 지레 공격하는 발악이 담긴, 그러나 지탱할 데 없는, 한없이 힘없는 눈이었다. 나는 갑자기 울컥하며 맥이 탁 풀렸다. 아들이라는 말에 앞뒤가 없어지는 여자, 뺑덕 없이도 내처 뺑덕어미로 불리는 여자. 그 뺑덕이 나라고 하면 어미는 어떤 표정이 될까?
어미는 패악을 부리고 악다구니를 퍼부어도 철저히 약자였다. 가막동에 살 때 온 동네 아이들 코피를 터뜨리고 다녔어도 끝내는 내가 약자였던 것처럼. 힘이 풀린 어미의 눈은 몸싸움에 이기고도 상처 받아 웅크려 들던 꼭 내 모습 같았다. '어머니!' 나도 모르게 속으로 불렀다. 밖으로 나온 말이 아닌데도 당황스러웠다. 눈물까지 차올랐다. 둘이 함께 눈물이라니, 무슨 이런……. 나는 결국 어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194-195쪽)


병덕이 도화동 주막에 찾아온 뒤로 어미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찾아온 줄도 몰랐어요. 그런데도 이 대목에서 병덕이 어미를 바라보는 시선이 전과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아들이 찾아오길 바라지 않는다면서도 아들 이야기에 바락바락 대들던 어미의 악에 받친 모습은, 필요 없다고 하면서도 어미 이야기만 나오면 주먹질을 일삼던 병덕 그 자신의 모습과 꼭 같은 것이었죠. 둘은 언제나 더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을 뿐, 겉과 다른 속셈을 숨기거나 무슨 거창한 목적을 이루려던 게 아니었어요. 제 어미의 삶을 똑바로 바라보게 된 병덕은 그제야 비로소 어미를 '어머니'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소설 뺑덕은 인물 내면의 갈등과 고민을 매우 섬세하게 묘사했습니다. 그 고민은 나를 존재하게 한 어미에 대한 거고요. 어쩌면 존재의 본질 자체에 대한 고민일 수 있겠죠. 어미를 바라보는 병덕은 매 순간 괴로움에 시달리며 출구를 찾아 헤맵니다. 그리고 작가는 병덕 같은 고민에 괴로워할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위로를 건네죠. 서툴고 미숙한 어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를 통해 내 안의 중심을 바로 세울 것을 담담한 어조로 부탁합니다. 어린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이런 이야기가 부디 더 많이 나오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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