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와 책 리뷰를 쓰는 것이 글쓰기를 막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접근하기 쉬운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직 독자적인 전문 영역을 구축하기 전이라면, 타인의 시간과 노력의 흔적을 따라가 보는 것이 글쓰기를 훈련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국내외의 훌륭한 텍스트를 접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세상이다. 좋은 책, 좋은 영화는 차고 넘친다.
물론 좋은 텍스트를 접하는 것과 좋은 리뷰를 쓰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영화를 보았어도 그 의미와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좋은 리뷰가 나올 리 없다. 근데 뭐, 그러면 어떤가.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닌데. 좋은 리뷰까진 아니어도 어쨌든 꾸준히 쓰다 보면 작품을 보는 나만의 기준이 생기고, 이 기준은 끊임없이 다듬어지며 발전을 거듭한다.
리뷰를 꾸준히 쓴다는 건 그만큼 책과 영화를 꾸준히 본다는 뜻이다. 그렇게 책과 영화에 관련된 데이터가 쌓이고 쌓이면 일종의 프레임이 형성되는데, 이를 통해 여러 작품을 비교하고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자기만의 프레임을 가지고 작품을 감상하기 시작하면 글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다. 읽기는 곧 쓰기가 되고 쓰기는 다시 읽기로 이어지는 무한 루프가 시작된다. 작품과 리뷰가 상호작용하는 궤도에 오르기만 하면, 글쓰기는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 된다. 그만큼 재미있다.
인상 깊게 본 작품에 대해서는 수십 개의 리뷰를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내가 쓴 것과 비슷한 톤으로 쓴 리뷰를 보면 반갑고,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트릭이나 의미를 소개한 리뷰를 보면 짜릿하다. 나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작품에 다가간 리뷰도 있고, 때로는 내가 생각한 것과 정반대로 쓴 리뷰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비슷함과 다름이 원작의 세계관을 치밀하게 재구축한다. 정확히 말하면, 작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재구축한다. 원작에서 파생되었지만 원작과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 리뷰의 세계가 열린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1813)을 처음 보았을 때 든 생각은 '시시콜콜하다'는 것이었다. 10년 정도 간격을 두고 다시 읽었을 때는 달랐다. 특정 시대가 그 안의 구성원에게 당연한 듯 강요하는 규범―또는 이중적 성도덕―과 그에 대한 복종, 저항, 그리고 인물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감정 묘사가 더없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해서 리뷰를 찾아 읽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우리 시대의 어떤 강요를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을까.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1868),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1877), 이디스 워튼의 『기쁨의 집』(1905),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1985) 같은 작품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른 시공간에 속한 사람들을 지배하는 요소를 온전히 그들의 맥락에서 파악하고, 이를 통해 내 삶과 가치관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각별한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내가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여성의 삶과 가치관을 간접적으로나마 깊이 있게 경험해보는 것은 책이나 영화, 그리고 이들에 대한 수많은 리뷰가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시간이 남아 위 작품 중 『작은 아씨들』에 대한 리뷰를 몇 개 검색해보았다. 책 리뷰는 호평 일색이고, 영화 리뷰는 반응이 엇갈린다. 원작에 대한 존경과 존중이 반영된 결과이리라 지레짐작하면서 어떤 것은 뜻깊게 읽고 어떤 것은 대강 흘려 넘겼다. 리뷰도 취향을 타기 마련이라 선택의 기로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만 '뒤로 가기'의 제물이 되고 마는 경우도 종종 있다. 미안하지는 않고, 그저 그 리뷰들이 각자 제 자리를 찾아 원작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로서 디지털 세계의 구석진 담벼락에 언제까지고 남아있기를, 덤덤한 마음으로 응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