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묶이는 삶
끊임없이 희망을 되새기는 일에 대하여
글쓰기는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까. 좋은 글은 그 글을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만들어줄까. 대답하기 쉽지 않다. 작가이자 연출가였고, 지금은 성범죄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윤택은 1990년 개봉한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에서 그야말로 빛나는 각본을 썼다. 그러나 그의 삶을 두고 가치 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추잡한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꾸준히 명성을 유지하는 일부 문인들의 수구적 관성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우리는, 글쓰기라는 행위가 반드시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안다. 요컨대 글 쓰는 사람이 글을 쓰지 않는 사람보다 무조건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글은 단순히 지적 유희에 불과한 것인가.
글에는 삶을 구속하는 힘이 있다. 글을 쓴다는 건, 내가 쓴 글에 스스로 묶이는 삶을 살기로 선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속의 정도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아예 구속력이 없는 글을 쓸 수는 없다. 내뱉는 즉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말 몇 마디에도 발화자를 붙드는 힘이 있는데, 긴 시간 공들여 쓴 글에 구속력이 없을 리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왜 제가 쓴 아름다운 글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삶을 살까.
서울대를 졸업한 자유기고가 A의 기사와 칼럼을 오랜 기간 애독했고, 그의 저서를 한 권 사서 읽었다. 글이 워낙 훌륭해서 생긴 호감이 A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호감으로 번졌다. 실제로 본 적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가 좋은 인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어느 날 그의 여자친구였던 B가 그의 데이트 폭력을 폭로했고, A는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정확한 사실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긴 해명글을 썼다. 그답게 유려한 글이었고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그게 실체적 진실에 기반한 글인지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영악한 계산에서 나온 글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 글을 끝으로 지금까지 A의 글을 읽지 않았다. 사람이 꼭 자기가 쓴 글처럼 사는 건 아니었구나. 값비싸게 아픈 깨달음이었다.
그렇다고 앞서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모든 글 쓰는 사람이 그렇게 이율배반적인 삶을 사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여전히 글쓰기가 한 사람의 내면에 여러 가지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다. 더 선한 삶, 더 이타적인 삶, 궁극적으로 더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의 글에는 그런 바람이 여실히 묻어나게 마련이다. 그런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의 진의를 앞서 언급한 몇 가지 안 좋은 사례를 근거로 들며 의심하기엔, 반대로 좋은 사례도 너무 많다.
미성년자로선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파키스탄의 여성교육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 소설 『작은 것들의 신』(1997)으로 유명한 인도의 반세계화 운동가 아룬다티 로이, 『백래시』(1991)로 한국에도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페미니스트 작가 수전 팔루디, 논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을 담고 있는『동물 해방』(1975)을 쓴 피터 싱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1994)를 쓴 미국의 지성 하워드 진, 벡델 테스트로 유명한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 등 그들 자신의 삶으로 글의 가치를 입증해낸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하워드 진의 말마따나― '희망을 고집'할 수 있다. 결국 글쓰기란 끊임없이 희망을 되새기는 일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글쓴이 스스로 자신의 글에 책임지는 삶을 살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보기보다 나약하고 게을러서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금세 처지고 느슨해진다. 자기 글이 추구하는 이상의 반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부도덕은 상당 부분 그 자신의 나태함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직접 쓴 글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글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