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효용
아주 낮은 확률로라도 가능하다면
매일 책을 읽는 사람에게 책을 읽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그냥'이라고 답할 것이다. 독서가 습관인 사람에게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끼니때 밥을 먹고 잠잘 때 베개를 베는 이유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간혹 뚜렷한 경제적 이익이나 삶의 노하우를 얻기 위해 특정 분야의 책을 섭렵하는 경우도 있지만 글쎄, 그건 독서보다 공부에 가깝지 않나.
고백하자면 나는 공부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공부를 멀리하려 애쓰는 편이다. 책은 매일 읽는다. 독서에는 무슨 거창한 노력이 요구되는 게 아니니까. 소파나 침대 옆에 마구잡이로 놓인 책 중 아무거나 펴고 읽으면 그만이다. 뭔가를 얻으려고 읽는 게 아니다 보니 부담이 없고 재미있다.
계획도 없고 질서도 없는 독서 패턴을 오래 유지하다 보니 이제는 책 읽는 이유를 요란하게 읊는 사람을 보면 이질감이 느껴진다. 연구자나 업계 종사자가 아니고서야 책은 그냥 재미로 읽는 거지, 무슨 위대한 업적을 이루거나 번개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읽는 게 아니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들은 어떤 일에 뚜렷한 성취동기와 기준이 부여되는 순간 재미와 흥미를 동시에 잃어버리고 만다.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독서를 시작했는데 몇 번을 읽어도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실패의 원인을 찾게 되겠지. 충분히 집중을 못했거나, 책 광고가 사기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내가 멍청하거나, 등등. 그럴 바엔 아무 이유도 목적도 없이 읽는 게 차라리 쿨하지 않나.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글쓰기는 즉각적인 효용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정해진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형식적인 것도 아니다. 그보다 집에 혼자 있을 때 소파에 늘어져 눕는 행위와 비슷한 것쯤으로 여기고 있다. 그냥 부담 없이 즐기는 오락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글쓰기가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글쓰기를 굉장히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말이라면 '글쓰기는 오락이에요. 재미있으면 하고 없으면 마는 거죠.' 정도 밖에는 잘 모르겠다.
물론 모든 글이 오락적 기능만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어수선한 시대가 고통을 동반한 사회적 글쓰기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태평한 글이나 쓰고 노닥거리는 게 천성에 맞는 나도 뉴스 채널 몇 바퀴 돌리다 보면 불쾌함에 어느새 한숨이 푹푹 나오니, 몇 자 끄적이고 싶은 마음이 왜 안 들겠는가. 단, 그것도 사적인 목표를 이룩하고 과시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온전히 고통받는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서 연대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쓸 자격도 생기지 않을까. 부족한 오늘은 그저 겁에 질렸을 피해자의 낮과 밤에 하루빨리 일상의 안온함이 깃들기만을 바랄 뿐.
별 거 아니라면 별 거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얘기들. 하지만 내뱉고 나면 어쨌든 후련해지는 느낌. 그리고 ―아주 낮은 확률로라도― 가능하다면 아픈 누군가에게 뜻밖의 위로로 닿을 수 있기를. 글에 대한 욕심과 지나친 자의식을 빼고 나면, 글쓰기의 효용은 사실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