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포털사이트 댓글란을 보지 않는다. 첫째 이유는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어디까지나 비주류에 불과한 그들의 톤과 매너가 마치 주류인 것처럼 포장되고 그 안에서 유통되는 모습이 우습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비주류인지 어떻게 아냐고? 물론 그들 개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알 수 없으나 여기서 그런 기준은 필요 없다. 우리는 이 사회의 주류를 학벌 엘리트 및 재벌과 동일시하는 데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 밖의 가능한 프레임들을 미리 차단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공간에는 그 공간의 특성을 반영하는 주류사회가 존재한다. 한국 정치계의 주류는 여의도에 있고 한국 영화산업의 주류는 충무로에 있다. 세계 금융의 주류는 월가에 있고, 첨단기술의 주류는 실리콘 밸리에 있다. 돈과 사람이 모여 붐비는 곳에만 주류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소규모 온라인 커뮤니티만 해도 해당분야 전문가나 헤비 유저를 축으로 하는 주류 세력의 존재를 파악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면 한국 포털 댓글란의 주류는 다수 악플러들의 차지가 되어버린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부 ―아주 많은― 사람들의 댓글 매너가 엉망인 것은 그들이 '가상현실'이라는 대단히 안일한 허구적 개념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상정하는 류의 가상현실은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주류로 급부상하는 일 따윈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가상현실은 그냥 온라인 '현실'이다. 악플러 같은 지질한 군상을 주류로 포섭하는 '현실'은 없다.
사람들이 면대면으로는 차마 할 수 없었을 말들을 댓글란에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는 것은, 그들의 현실인식능력이 매우 끔찍한 수준에 정체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게임 속 NPC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가상현실 개념이 실재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똑같이 쓰이는 것이다. 그 결과 누군가는 아파 신음하고, 누군가는 화내며 적극 대응을 예고하고, 누군가는 고소장을 손에 든 채 거짓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정말로 죽는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공간은 결코 가상현실일 수 없다. 그럼에도 몇 번의 죽음이 데자뷰같이 반복되는 동안 댓글란의 분위기는 요지부동이다. 끝도 없이 유입되는 비주류가 자격 없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아주 어린 아기들은 숨바꼭질 놀이를 할 때 머리만 숨거나, 눈을 가리곤 한다. 자기 눈에만 안 보이면 세상으로부터 잠시 단절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은 어른들의 온라인 댓글 놀이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들은 익명성이란 빈약한 토대 위에서 저급한 숨바꼭질을 즐긴다. 내가 쓴 댓글이 흐르고 흘러 누군가의 심장에 치명적인 상처를 내더라도 그건 게임의 일부일 뿐이다. 도착적 승리감에 취해 다시 익명성의 늪으로 잠기면 그만이다. 어차피 내 눈엔 모니터만 보이니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유아들의 수준에서 한 걸음도 못 나간 지금의 댓글 윤리는 인간종에 대한 실망감과 피로감을 크게 높인다.
그렇다고 댓글을 쓰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연예뉴스 댓글 서비스가 여러 포털에서 순차적으로 폐지된 것은 물론 환영할 일이나, 그렇다고 악플러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나. 단기적으로는 댓글 서비스 제한 및 폐지를 고려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좋은 댓글이 더 많이 순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용자도 마찬가지다. 악플에 단호히 맞서고 법적 책임을 물리는 노력에 더불어, 멀쩡한 댓글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놀 수 있어야 건강하고 긍정적인 댓글 문화가 뿌리내릴 것이다.
'멀쩡한 댓글'의 기준을 세우는 건 물론 불가능하다. 의미도 없고. 다만 우리에겐 악플의 위력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의식적 노력이 요구된다.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는 천박한 말들이 비처럼 쏟아질 때 담담히 받쳐 세울 우산 하나 정도는 챙겨두는 것이 댓글 세계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교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