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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n 18. 2020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방법

질 티보, 『두려움을 담는 봉투』, 2015

* 쪽수: 60쪽



주인공 어린이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 이 책의 천진한 문장들은 잠들기 전 편안히 누운 자세로 읽어주기에 더없이 좋습니다. 사실 이 매거진에 실리는 글들은 모두 어린이가 스스로 하는 독서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한글 학습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초등학생 때부터 읽는 것이 좋겠지만, 어른이 읽어주는 경우에는 그보다 어려도 상관없습니다. 특히 이 책은 아직 글자를 모르는 어린이에게 읽어주어도 괜찮을 만큼 담백한 문장들로 서술되어 있어요.


『두려움을 담는 봉투』에는 굉장히 섬세하고 아름다운 삽화가 쪽마다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줄 때는 중간중간 삽화를 꼭 보여주셔야 해요. 작가는 '두려움'이란 감정의 색채 이미지를 서늘한 파랑으로 묘사했는데, 이것만 가지고도 꽤 흥미로운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책 속에서 두려움을 상징하는 푸른색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등장하는 '슬픔이(Sadness)' 캐릭터의 푸른색과도 얼추 포개어집니다. 푸른색을 뜻하는 영단어 'Blue'가 '우울하다'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 것과도 연결해볼 수 있을 듯하고요. 푸른색은 우리의 감정 상태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다른 감정들에도 저마다 어울리는 색채가 있을까요? 이렇게 감정의 성질을 색채 이미지와 연관 지어 떠올리는 대화는 어린이들의 지적, 창의적 사고를 자극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주인공 소년 마티유는 맨발로 물놀이를 하던 어느 날 뱀을 발견하고는 처음으로 강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시간이 지나 가라앉은 줄 알았던 두려움은 며칠 뒤 자동차 사고를 목격한 현장에서 다시금 마티유를 덮쳐오죠. 마티유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합니다. 힘껏 달려도 보고, 여러 잔의 물을 한 번에 들이켜도 보고, 코미디 프로를 보며 한바탕 웃어보기도 하죠. 하지만 두려움은 여전히 마티유의 마음 한 구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온갖 걱정들이 두려움으로 바뀌어 마티유를 괴롭히죠.


자전거 자물쇠 열쇠를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학교에 도시락 싸 가는 걸 잊지 않을까? 바지가 더러워지면 안 되는데…….
몇 주가 지나자, 두려움들이 조금씩 커졌어.
수업 시간에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해야 하면 어쩌지? 선생님께 야단을 맞으면 어쩌지? 비행기가 떨어져서 우리 집이 망가지면 어쩌지?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면 어쩌지? 무시무시한 두려움들이 꿈에 나타나면 어쩌지?
몇 달이 지나는 동안 두려움은 점점 몸집이 커졌어.(28쪽)


마티유의 상태를 눈치챈 부모님은 마티유를 병원에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마티유는 두려움을 소리 내어 말하는 법을 배우죠.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것이 두려움에 맞서는 첫 번째 방법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 배움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돼요. 그건 바로,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거죠. 내가 가진 두려움을 주변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드러내다 보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게 됩니다. 이제 마티유는 두려움을 봉투에 담아 날려 보내는 방법을 할아버지에게 배웁니다. 두려움을 마냥 거부할 게 아니라 용기를 내어 직면하고 그것의 성질을 제대로 파악하여 이용하는 법을 익히는 거죠.


"얘야, 마티유. 두려움을 느끼는 건 아주 정상이란다. 두려움은 우리를 위험에서 보호해주기도 하거든. 개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면 무서운 게 정상이야. 그래야 무서운 개를 피하지. 시험을 앞두고 시험을 망치면 어떡하나 떨리는 것도 정상이고. 그래야 열심히 공부할 거 아니니? 그네에서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것도 정상이란다. 그래야 조심하니까. 두려움을 너무 겁내지 마."(44쪽)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도 처음엔 피해야 할 감정으로 간주되던 '슬픔'이 결국 라일리의 성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잖아요. 『두려움을 담는 봉투』도 정확히 같은 루트를 가는 거죠. 어린이들은 대체로 이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익숙한 생각의 한 겹을 벗겨내면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거짓말처럼 촤라락 펼쳐지는 이야기 말이에요. 마티유가 내내 회피하던 '두려움'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과정도 마찬가지죠.


이 책으로 대화를 나눌 때에는 되도록 온 가족이 함께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두려움은 어린이한테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어른들도 제각기 두려움이 있고, 때로는 그 두려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죠. 이렇게 서로 다른 두려움들을 주제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책으로 여럿이 함께 하는 대화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많은 분들이 자녀의 행복과 건강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진솔하게 나누었습니다. 진지하게 자기 두려움을 돌아볼 기회가 되어서 좋았다고 하는 분의 소감도 인상 깊었고요. 가족 안에서도 이런 뜻깊은 대화가 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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