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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l 29. 2020

말처럼 쉽지 않고 마음처럼 되지도 않는

노아 바움백, <결혼 이야기Marrige Story>, 2019

* 스포일러 : 약함



노아 바움백Noah Baumbach의 영화 <결혼 이야기>는 이혼의 초입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가독성 높은 '이혼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의 제목은 '이혼 이야기'가 아닌 걸까.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이혼 이야기'라는 타이틀이 영화 제목으로선 영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혼 이야기>에 정말로 이혼 이야기를 담는 것보다는 <결혼 이야기>에 이혼 이야기를 담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고 함축적이며 또한 극적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냥 그렇기 때문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영화의 주인공인 찰리(애덤 드라이버Adam Driver)와 니콜(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들이다. 아들 헨리에게 좋은 부모인지, 서로에게 잘 맞는 배우자였는지는 보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으나 적어도 그들이 꽤 괜찮은 사람인 것만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둘은 뉴욕의 한 극단에서 함께 일해왔다. 니콜은 매력 있는 주연 배우고 찰리는 유능한 감독이 극단의 리더다. 문제는 둘의 전문성 영역이 부부 관계의 사적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일터에서마저 부부일 수밖에 없는 찰리와 니콜은 정작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서로의 시선을 어색하게 회피한다. 둘은 이혼이라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소리 없이 걷고 있다.


처음에 부부는 협의 이혼을 하기로 했지만 니콜이 유능한 변호사 노라(로라 던Laura Dern)를 만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원만하게 진행될 것처럼 보이던 이혼 절차는 양측 변호사의 법리적 계산에 의해 미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치밀하게 전개된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찰리와 니콜은 법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고 상대에게 불리할 여러 정황에 관한 진술을 각자의 법률 대리인에게 제출한다.


니콜이 노라를 처음 만나 자기 사연을 털어놓는 장면의 롱테이크는, 그녀의 결혼 생활을 압축적으로 전달할 뿐만 아니라 니콜이라는 인물의 입체성을 전달하는 측면에서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연출을 보여준다. 니콜이 쏟아내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관객들이 일차적으로 동기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럼 찰리는? 니콜처럼 캐릭터의 입체성이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결말부의 설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묘사되는 두 사람의 아이덴티티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스토리텔링 비중은 얼추 비슷하다. 하긴, 그래야 형식적으로 공평하지 않겠는가. 어느 한 사람의 삶을 집중적으로 추적하며 깊이 감정 이입하는 건 이런 이야기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찰리와 니콜이 썩 괜찮은 사람들임에도 끝내 좁힐 수 없는 격차를 부각하기 위해, 영화는 두 사람의 현재를 수직으로 교차시키는 한편 낭만적이고 행복했던 과거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다.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 불행과 미움만 남은 건 아니다. 결혼은 그렇게 단순한 방정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찰리와 니콜서로가 괜찮은 어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처음에 협의 이혼을 하려던 것도 상대에 대한 일정량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니콜이 이혼에 관한 법적 절차를 변호사에게 의뢰한 건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예방하고 일을 말끔히 매듭짓기를 원해서였지, 찰리와의 법정 다툼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동안 양보와 배려를 바탕으로 원활히 해결해온 문제들이 법정에서 낱낱이 해부되는 순간, 그 사연의 내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당사자 부부는 깊은 내상을 입고 침잠한다. 이후 결말부에 등장하는 설전에서 급기야 둘은 격앙된 감정으로 서로를 비난하고 저주하며 부러 위악을 부린다. 그 위악이 진심으로부터 얼마나 먼지, 그럼에도 그 위력은 얼마나 파괴적인지, 영화는 조용하면서도 묵직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찰리는 양육권자로서의 적합성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찾아온 직원과 면담 중에, 아들에게 사주기로 약속한 작은 칼을 꺼내 장난스럽게 자신의 팔을 긋는 시늉을 하다가 그만 실제로 자해를 하고 만다. 황급히 직원을 떠나보낸 뒤 철철 흐르는 피를 간신히 틀어막고 지쳐 쓰러지는 찰리의 모습은, 한껏 부풀린 위악이 의도치 않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과정을 매우 직설적으로 암시한다.)


이것이 보편적인 결혼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결혼은 그렇게 단순한 방정식으로 설명될 수 없으니까. 결혼 생활이 내내 엉망진창이었던 건 아니었음에도, 당신과 함께 한 모든 순간이 불행이었다고 토하듯 절규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래서 더 슬프다. 더없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때때로 말처럼 쉽지 않고, 마음처럼 되지도 않는 시간들.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결혼 이야기>로 간주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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