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2017년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The Shape of Water>에 대한얘기를 해보자. 영화는 미소 간 우주 경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몬스터(또는 은서 동물) 마니아 감독의 작품답게― <셰이프 오브 워터>에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디자인된 양서류 인간이 도입부부터 등장한다. 아마존에서 포획된 이 양서류 인간은 연구소의 피실험체로 격리 수용되어 있다. 편협한 시각을 가진 연구소 직원이 보기에 양서류 인간은 괴생명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만, 애초에 이 영화에선 정상생명체와 괴생명체를 분류하는 과학적 기준선이 존재한 적이 없다. 양서류 인간을 괴물로 정의할 과학적 근거가 없음에도 일말의 주저함없이 그를 해부용 실험체로 쓰자고 주장하는 연구원들의 무감각한 태도는, 공포와 혐오를 경쟁의 동력으로 삼던 냉전 체제의 살풍경을 스산하게 드러낸다.
엘라이자(샐리 호킨스Sally Hawkins)는 이 연구소에서 청소부 일을 하고 있다. 어릴 적 목에 입은 상처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엘라이자는 자신의 언어장애를 정체성의 일부로 안고 살아간다. 우연한 계기로 양서류 인간의 존재를 알게 된 그녀는 그에게 몰래 다가가 조심스럽게 소통을 시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엘라이자의 언어장애는 이들의 만남과 교류에서 더 이상 장애로 기능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양서류 인간도 미국식 영어를 소리 내어 말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만, 영화 속 맥락에서 더 핵심적인 요인은 엘라이자의 언어장애를 인지조차 못하는 양서류 인간의 편견 없는 시선에 있다. 그에겐 엘라이자의 언어장애를 '장애'로 인식하는 프레임 자체가 없다. 둘은 곧 사랑에 빠진다.
엘라이자와 양서류 인간(출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이 이야기의 핵심 재료인 양서류 인간과 엘라이자의 마이너리티는, 정작 당사자인 그들에겐 낭만적 사랑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어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사랑하는 것. 알고 보니 이 양서류 인간에게는 놀라운 치유능력이 있는데, 그는 끝까지 엘라이자의 언어장애를 치유하지 않는다. 치유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의 결말부에서 그는 치명적 부상을 입은 그녀를 안고 물에 뛰어내려, 그녀가 호흡할 수 있도록 목의 상처를 아가미로 개조한다. 인간사회에 속해있던 내내 그녀의 마이너리티로 기능했던 목의 흉터가 진정 자유로운 삶의 핵심 요소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물속에선 그 누구도 엘라이자의 장애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고, 양서류 인간을 괴생명체로 분류하지도 않을 것이다. 메이저와 마이너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 나는 이 영화에 담긴 전복적 메시지가 촌스럽지 않아서 좋다.
이제 박상영의 연작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 얘기를 해보자. 여기에 실린 네 편의 이야기들에서 1인칭 화자인 '영'은 게이다. 이 문장이 모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인공―그리고 그에 이입하는 현실의 수많은 일부 독자들―의 다양한 정체성 중 '게이'를 맨 앞에 내세울 권리는 나에게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들에 시종 뚜렷이 강조되는 성적 취향을 애써 못 본 척, 부러 뒤로 미루어 위장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읽은 인상대로 쓰자면, 그는 게이다. 그리고 이 마이너리티가 네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부품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 그래서나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다고. 나는 그 말이 좋아서 계속 입 안에 물을 머금듯이 되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228쪽)
낭만이란, 이상적인 사랑의 상태나 조건을 이르는 말은 아닐 것이다. 성마르고 서툴렀던 시절을 못내 그리워하며 그때가 낭만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사랑이 빈틈없이 감미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온갖 불완전했던 것들을 용인할 수 있을 만큼은 너그러웠기 때문이다. 낭만의 분홍빛 커튼을 걷어내면, 같은 자리에서 외설과 타락과 불륜까지의 거리는 사실 그리 멀지 않다. 때문에 고정된 개념으로서의 사랑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하다.
다시 박상영의 대도시 서울로 돌아가 보자. 이 도시에 어지럽게 그려진 사랑은 낭만적인가. 사람들이 흔히 품고 있는 예쁜 사랑의 전형성에 들어맞지 않고, 편견 어린 정상성의 범주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랑을 낭만의 영역에 들여놓을 여지도 충분하다. 불완전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창한 마이너리티로 규정하기보다, 그저 작은 물방울처럼 뜻 없이 존재하는 무엇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사랑하는 것. 나에겐 이것이 우리 시대에 세울 수 있는 낭만적 기준의 최대치로 느껴진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국내에서 개봉할 때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가 추가되었는데, ―이것이 과연 적절했는지 여부와 별개로―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에도 비슷하게 달아봄직한 타이틀이다. '사랑과 낭만의 모양' 정도면 어떨까. 엄밀하게 정형화된 도형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변하고 결합할 수 있는 형태로서의 사랑과 낭만에 대한 이야기들. 「재희」는 스트레이트 여성인 '재희'와의 관계를 통해 주인공 '영'의 캐릭터를 거칠게 표현했고,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아직 미숙한 시기에 열병처럼 찾아왔다 그만큼 공허하게 떠나가버린 사랑을 묘사했다. 표제작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묘사하는 감정은 이전 사랑의 경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형태의 사랑이다. 그것이 과연 더 성숙하고 아름다웠는지를 규정하는 것은 적어도 내 몫은 아닐 것이다.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지난 사랑의 흔적에 관한 이야기, 한 사람의 내면에 인장처럼 각인된 감정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얼핏 시간의 흐름과 인과의 원칙에 맞추어 서술된 것으로 보이는 구성이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긴 여운을 남긴다.
덧붙임 1
이 책에는 퀴어 이슈 외에도 일관적으로 표현되는 정서가 몇 가지 있다. 철저한 자기 객관화를 바탕으로 한 블랙 유머, 그리고 오만한 세상에 대한 냉소로 단단히 무장한 작가 특유의 어법이 이 소설의 문체와 인상을 돋보이게 한다.
덧붙임 2
우리나라 성인 스트레이트 남성과의 관계가 형-동생, 오빠-동생으로 규정되는 순간 온갖 예의와 격식이 휘발되어 버리는 문제를 경험으로 아는 독자라면, 이 책에서 묘사된 게이 남성 간의 대화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얼마나 성숙한 것인지도 쉽게 알아챘을 것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성들은 서로에 대한 형식적 예의를 중요시하는 듯 보인다. 그것이 얼마나 현실을 충실히 반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 눈엔 좋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