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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Sep 12. 2020

여자는 작은 말 한마디에 감동한다고?

저무는 세대의 무리수

지난 수요일, 라디오스타에 하희라-최수종 부부가 나왔다. 대화에서 소개하는 몇몇 에피소드를 흘려듣던 중 최수종의 말 하나가 유독 귀에 꽂혀 들어왔다. "여자는 꽃다발이나 선물에 감동하는 게 아니라, 작은 말 한마디에 감동하는 거예요." 역시 최수종답다. 이런 비슷한 얘기를 들어본 게 언제였더라. 15년쯤 전에 들었어도 너무 뻔해서 진부하게 느껴졌을 대사를 저렇게 태연하게 치다니. 혹시 최수종은 8090의 한국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게 아닐까. 그래서 그 시절에 알아주던 멘트를 작정하고 남발하는 게 아닐까.


조금 더 뒤로 돌아가 보자. 한국 근대 문학 속에서 여성은 대부분 수동적, 도구적으로 묘사된다. 악의적으로 왜곡된 여성상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작품도 많다. 모두 빈약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당시 발표된 모든 작품이 졸작이라는 뜻은 아니다. 걸출한 작가들조차도 여성을 입체적으로 그려내지 못한 것은, 사실 그들 개인의 오류라기보다는 시대 자체가 그런 여성의 존재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한 탓이다. 최근에는 이에 대한 반성 내지 반작용으로 소위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이 맥락 속에서 많은 '고전'들이 그동안 누리던 명예와 지위를 박탈당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하지만 모든 변화가 곧장 우리 삶의 언어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최수종의 멘트가 그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여자는 작은 말 한마디에 감동한다'는 그의 말은, 값비싼 선물을 기대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은연중에 배제한다. 왜 여자는 작고 사소한 말 따위에 매번 감동받아야 하는가. 남자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아내의 칭찬 한 마디 한 마디에 생체리듬이 달라지는 기분파 남편인데, 그 누구에게서도 '남자는 작은 말 한마디에 감동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건 그냥 나 한 사람의 성격이 된다.


그렇다면 최수종의 말도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희라 씨는 꽃다발이나 선물보다 작은 말 한마디에 더 크게 감동해요."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자를 대충 편견으로 뭉뚱그린 뒤 지난 세대의 언어로 규정할 게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퍼스널리티를 언급하는 데서 그쳐야 한다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자기 경험의 스케일을 뛰어넘는 이야기는 그만큼 조심해서 하는 것이 맞다.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자존감 높은 남성과 여성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겠는가.


<타짜>(2006)의 김혜수와 <마녀>(2018)의 조민수 같은 캐릭터가 한국에서 정말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캐릭터 디자인이 남성 인물에 견주어도 막상막하거나 되려 압도할 만큼 훌륭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이 '멋있는 속물 여성'이기 때문이다. 남을 희생하면서까지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하는데도 그토록 입체적으로 스타일리시하게 그려지는 한국인 여성 캐릭터는 정말로 흔치 않다. 그러니 내가 이 영화 속 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시시한 소리는 그만하면 됐고, 나를 놀라게 할 선물이나 내놓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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