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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Sep 13. 2020

믿음과 용기에 관한 이야기

이현, 『악당의 무게』, 휴먼어린이, 2014

* 쪽수: 180쪽



『악당의 무게』 속 '악당'은, 주인공 수용이가 떠돌이 개에게 지어준 이름입니다. 개의 옆구리에 흉터처럼 칠해진 빨간 스프레이 자국을 보고 친구 한주는 '조폭'이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했지만 수용이는 그보다 멋스러운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던 거죠. 무표정한 얼굴과 커다란 몸집, 옆구리의 붉은 스프레이 자국, 사람을 경계하고 멀리하는 신중함,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모습까지. 수용이는 이 개에게 악당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용이네 집은 경복궁을 둘러싸고 복원된 성곽의 바깥쪽 어느 가파른 계단 끝에 있습니다. 그리고 악당은 성곽에서 이어지는 산속 어딘가에 살죠. 수용이와 한주가 성곽으로 이어지는 산길 초입에서 악당과 처음 만난 뒤 그곳은 셋만의 비밀 아지트가 됩니다. 돼지갈빗집을 하는 한주네서 갈비뼈를 몇 개 챙겨 아지트에 가면 곧 악당이 나타나죠. 하지만 악당은 사람 손을 타지 않는 들개입니다. 2미터 안으로는 다가오지 않아요.


그러던 어느 날 새벽, 한 떠돌이 개가 동네에서 탐욕스럽기로 소문난 부동산 황 사장을 물어 빈사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위험한 들개의 출현 소식은 TV 뉴스에까지 실리고, 수용이와 한주는 목격자의 증언과 뉴스 속 CCTV 영상을 통해 그 들개가 바로 악당임을 알게 됩니다. 잡히면 안락사를 당하게 될 거라는 사실과 함께 말이죠. 게다가 악당이 잡히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눈에 띄는 붉은 스프레이 자국은 악당의 정체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수용이와 한주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악당은 사람에게 접근하지 않는 개였으니까요.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보았을 때 지나가는 사람을 이유 없이 다치게 할 개가 아닌 겁니다.


"악당한테 뭔가 사정이 있는 거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어."
(……)
우리는 늘 조용히 마주 보기만 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말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악당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답답하게 느껴졌다. 답답한 마음에 내 입에서 괜한 말이 절로 나왔다.
"야, 너 대체 왜 그랬어?"(62-63쪽)


이 이야기에서 악당을 대하는 수용이의 태도는, 사춘기 소년을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에 얼추 포개어지는 듯합니다. 수용이는 말썽 부린 악당이 답답하고 속상하면서도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죠. 지켜주고 싶은 존재에 대한 애틋함이 여러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믿음입니다. 악당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아직 어린 수용이와 한주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줍니다. 둘은 그날 새벽에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황 사장이 입원한 병실을 찾아가지만 정작 알게 된 사실은 황 사장이 거짓말쟁이라는 것, 그리고 소문처럼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것뿐이죠. 자기 행동을 해명할 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는 악당에 비해 인간들은 온갖 거짓과 과장으로 사건의 본질을 가릴 수 있는 겁니다. 수용이가 알게 된 사건의 진상은 황 사장의 말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철저히 악당의 입장에 서서 사건을 바라보는 수용이에게는 이 모든 게 불공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한 건 황 사장 아저씨잖아. 벌 받아야 할 건 그 개가 아니라 황 사장 아저씨라고. 근데 경찰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 개만 잡으려고 해. 그러니까 아빠가 말해 줘야 해. 아빠가 경찰한테 가서 사실은 황 사장 아저씨가 그 개를 먼저 공격한 거라고……."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경찰이라니? 이게 잘잘못을 따질 일이야? 어쨌든 개가 사람을 물었어. 그러니까 위험한 개야. 잡아들이는 게 당연한 거고. 누가 먼저 공격을 했네 어쩌네 그렇게 따질 문제가 아니야."
"왜?"
"뭐?"
"왜 그걸 안 따져?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아야지. 왜 죄 없는 개가 경찰한테 쫓겨?"
"얘가 점점…… 왜라니? 개니까 그렇지. 개가 사람하고 같아?"(99-100쪽)


개에게도 목숨은 하나밖에 없다. 죽고 싶지 않을 거다. 만약 죽게 된다면, 몹시 두렵고 아프고 또 슬플 거다. 그런 건 개나 사람이나 다름없다. 내 생각은 그렇다.(101쪽)


악당의 옆구리에 누군가 칠해놓은 붉은 스프레이 자국은 일종의 낙인입니다. 해롭고 위험하다는 표식이죠. 처음에 어떤 사연으로 그런 낙인이 찍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 낙인이 현실에서 휘두르는 영향력입니다. 사람들이 악당을 바라보는 편견 어린 시선은,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예민한 시기를 지나는 어린이에게 흔히 갖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오해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습니다. '악당'이란 이름은 그런 면에서도 참 절묘하죠. 악당이 실제로 악한 건 아니잖아요. 결국 눈에 띄는 몇몇 특징들로 손쉽게 악동이나 문제아로 낙인찍히는 사춘기 어린이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악당이 실제로 그렇게 위험한 개가 아니라는 걸 아는 수용이는 수많은 어른들의 위협에서 악당을 구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 결심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죠.


저 붉은 스프레이는 도대체 누구 짓일까.
(……)
스프레이니까 분명 사람의 짓이다. 누군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일부러 악당의 몸에다 붉은 줄을 그어 버린 것이다. 수련회 때 자는 애들 얼굴에 그린 낙서처럼 장난스럽지도 않고, 연예인의 문신처럼 멋지지도 않다. 실수로 그린 것도 아니다. 악의적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악의, 그건 아주 나쁜 뜻이라는 말이다. 누군가 아주아주 나쁜 뜻으로 악당의 옆구리에 칼에 베인 것 같은 자국을 남긴 것이다.(121-122쪽)


어딘가 개들을 위한 세상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에서는 개가 주인이 되어 사람을 키울지도 모른다. 그러면 사람은 개들에게 꼼짝 못하고 당하겠지. 나쁜 개를 만나면 길에 버려지고, 나쁜 개가 옆구리에 붉은 스프레이 자국을 남겨도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고, 죄 없이 두들겨 맞아도 변명 한 번 못 해 보고 안락사당하게 되겠지.
(……)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144-145쪽)


때때로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습니다. 정말 어려운 건 옳은 일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죠. 옳은 일을 하는데 드는 온갖 현실적 비용을 생각하면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삶에는 그런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수용이는 여러모로 평범한 어린이예요. 그런데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를 보여주죠. 용돈을 탈탈 털어 산 고기에 동물용 마취제를 뿌려 악당에게 먹이고, 잠든 악당을 수레에 싣고 최대한 멀리 데려가서 풀어주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차분히 실행에 옮깁니다. 아쉽게도 이 계획은 결정적 순간에 실패로 돌아가고, 악당은 경찰의 총에 맞아 죽게 됩니다. 이후 사건의 내막과 수용이의 용기 있는 행동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악당의 시신은 화장되어 상자 속에 담긴 채로 수용이의 손에 넘겨집니다. 수용이는 가벼워진 악당의 무게를 느끼고,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습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빠르고 박진감 넘치게 끌고 가기보다, 독자들이 수용이와 악당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서서히 전개하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그런데도 결말부에 이르면 상황은 어느새 절박해져 있는데, 안타깝게도 어린 수용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죠. 아마 등장인물에 천천히 스며들 수 있게 해 준 스토리텔링 덕분에 이런 결말의 완성도가 극적으로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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