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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Sep 20. 2020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앤서니 브라운,『돼지책PiggyBook』, 1986

* 쪽수: 40쪽



먼저 책의 표지를 봅시다. 제목과 그림이 인상적이죠. 지금이야 너무 유명한 책이지만, 처음 나왔을 때는 표지만 보고도 호기심을 느낀 사람이 많았을 겁니다. 작가가 태어난 영국에서는 1986년에, 그리고 한국에서는 2001년에 각각 최초로 발행되었는데, 알다시피 이 시기는 부부와 미혼 자녀로 구성되는 핵가족 형태가 안정화 단계로 접어든 때입니다. 형식적으론 그랬는데, 각 가족의 내부로 시선을 옮겨보면 여성의 가사노동을 전제로 하는 모순적이고 불안정한 규범이 여전히 남아 있던 때이기도 하고요. 물론 지금도 이에 대한 반성에서 자유로울 순 없죠. 이 책의 표지그림은 그 점을 매우 직설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린이가 여덟 살쯤 되면 이 책의 표지만 봐도 대강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세 명의 남성이 한 여성의 등에 업히는 건 대부분의 가정에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일종의 비유적 표현으로서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짐을 지우고 있다는 뜻이구나 하는 정도는 어린이들도 직관적으로 이해하죠.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짐을 지는 사람이 누구냐는 겁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덤덤한 표정. 바로 '엄마(아내)'입니다.


오랫동안 엄마란 존재는 말속에 담긴 의미와 역할 이상의 것을 해내도록 요구받는 존재였습니다. 동시에 그에 대한 대가나 보상을 요구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지요. 우리는 의무와 권리가 상호 대응하는 관계에 있다는 상식을 편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엄마의 가사노동에는 어떤 대가도 지불하려 하지 않는 사회에 길들여져 왔습니다. '모성애'라는 성역화된 이미지에 맹목적으로 기대어 사회를 아슬아슬하게 지탱해 온 겁니다.


"여보, 빨리 밥 줘." 피곳 씨는 아침마다 외쳤습니다. 그러고는 아주 중요한 회사로 휑하니 가 버렸습니다.
"엄마, 빨리 밥 줘요." 사이먼과 패트릭도 외쳤습니다. 그러고는 아주 중요한 학교로 휑하니 가 버렸습니다.(10-11쪽)


'아주 중요한 회사'와 '아주 중요한 학교'에서 각자의 기 위해 피곳 씨와 사이먼과 패트릭은 아침마다 밥을 달라고 당당히 외칩니다. 이들이 찾는 '여보'와 '엄마'는 부엌에서 열심히 밥을 짓고 있겠죠. 그래야 소중한 가족이 밖에서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결정적으로 피곳 부인에겐 이름이 없습니다. 이건 서구의 결혼제도를 둘러싼 관습 때문이기도 한데, 그런 작품 밖 현실이 작품 속 모순을 더욱 부각해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름은 곧 정체성인데, 이 이야기의 3인칭 화자조차도 피곳 부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요. 여기에서 이름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습니다. 책을 한 장만 앞으로 넘겨서 이야기의 시작을 볼까요.


피곳 씨는 두 아들인 사이먼, 패트릭과 멋진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멋진 정원에다, 멋진 차고 안에는 멋진 차도 있었습니다.
집 안에는 피곳 씨의 아내가 있었습니다.(9쪽)


그러니까 '피곳 씨의 아내'는 마지막에 소개되는 걸로도 모자라 이름도 없이 집 안에 있는 거예요. 첫 장의 그림에서도 피곳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원에서 멋진 집과 차를 배경으로 서 있는 피곳 씨와 두 아들만 보이죠.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침대를 정리하고, 청소하고, 다림질을 하고, 간식을 만드는 온갖 일을 도맡아 하는데도 우리는 이 책에서 피곳 부인의 목소리 한 번 들어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피곳 부인은 출근도 하는데, 사실 한국의 많은 가정에서 너무 흔한 일이라 새삼 놀랄 것도 없죠. 결국 피곳 부인은 '너희들은 돼지야.'라는 짤막한 메모를 남기고는 집을 떠나고, 그때부터 피곳 씨와 두 아들은 그림 속에서 돼지로 묘사됩니다.


이 책을 보다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영화 속 마녀가 관리하는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름을 잃게 되잖아요. 이름의 소거는 개별자로서의 정체성을 박탈하는 핵심 장치입니다. 인물들은 이름을 잊고 살다가 어느새 자신의 존재마저 잊고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변해가죠. 『돼지책』의 피곳 부인처럼요. 그뿐인가요. 영화 초반, 주인 없는 가게에서 온갖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던 치히로의 부모님이 돼지로 변하는 설정도 이 책의 줄거리와 꼭 닮아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채로 당연한 듯 누리는 안락함이 실은 모종의 불합리한 관습에 기대고 있음을 암시하는 거죠.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제 개인적 견해로는 이해하기 아주 쉬운 영화는 아니라서 이 책을 먼저 읽고 나서 보는 것이 어린이 입장에선 더 흥미롭게 느껴질 듯합니다.


『돼지책』의 결말에선 비어버린 엄마의 존재감을 느낀 가족들이 집안일을 나누어하면서 모두가 미소 짓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엄마도 비로소 개성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잔잔하게 웃고 있죠. 해피엔딩이라 좋긴 한데, 이야기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모순적 현실의 반영인 이상 그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만 끝나선 안 되겠죠. 책을 덮은 뒤에도 어린이들의 마음에 울림이 남으려면 질문 하나가 더 필요합니다. 왜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집안일을 전부 떠맡아야 했을까요? 실제로 책 속 가족의 모습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수많은 가족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 엄마들은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존재로만 여겨졌던 걸까요? 숭고하게만 느껴왔던 엄마의 사랑이 어쩌면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사회적 편견의 일환은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 알고 보면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요? 어린이들이 고정된 성역할이란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유연하게 사고하는 태도를 기르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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