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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an 01. 2021

지난 세대가 보내는 따뜻한 응원

권정생 글, 이지연 그림, 『들국화 고갯길』, 창비, 2020

* 쪽수: 44쪽



1978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실린 권정생의 단편 동화 『들국화 고갯길』이 그림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야기는 반전과 평화를 말하고 있고, 여기에 이지연의 그림이 더해져 그 옛날 농촌의 목가적인 풍경을 가슴 찡하게 담아내고 있죠. 이지연은 2013년과 2015년에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된 바 있네요.


이야기는 신작로 가로수길, 할머니 소가 나무에 매여 있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할머니 소는 곧이어 등장하는 꼬마 황소를 타이르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면서 따뜻한 대화를 이어갑니다. 어린이를 위해 인세를 써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저자 본인의 심성을 그대로 투영한 캐릭터을 짐작할 수 있죠.


할머니 소가 끄는 수레에는 비료 부대가 실려 있고, 꼬마 황소가 끄는 리어카에는 대포 같은 시멘트 굴뚝이 세 개나 얹혀 있습니다. 꼬마 황소는 제 리어카를 할머니 소에게 보이며 의기양양하게 말합니다.


"(……) 할머니, 이것 꼭 탱크 같죠?"
꼬마 황소는 제가 끌고 온 리어카를 한 번 추슬러 뵈며 자랑 투로 말했습니다.
"에그, 무서워라. 탱크가 다 뭐니? 그런 말 하면 못써요."
"헤헤, 할머니도. 나 지금이라도 이마에 태극기 붙여 주면 싸움터에 나가겠어요. 이 탱크 앞장 세우고."
"글쎄, 그런 말 말래도. 잠자코 집으로 가는 거야. 싸움터 같은 게 다 뭐니. 우린 싱싱한 풀이 가득 찬 들판으로 가는 거야. 거기서 밭 갈고 씨 뿌리고, 그리고 거둬들이고……."

(16쪽)


이 책에 등장하는 소들의 모습은 토속적인 농촌의 전원풍경과 대조적으로, 전장의 기갑부대와 후방 보급부대의 배치를 연상시킵니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시기엔 더 그랬겠죠. 온 나라가 전쟁을 치렀던 때로부터 그리 멀리 오지 않았으니까요. 아마도 할머니 소는 전쟁의 참화를 직접 목격했을 겁니다. 그 끔찍한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할머니 소는 철없는 꼬마 황소의 흥분을 부추기는 대신 일상적인 주제로 대화를 환기시키죠. 순진한 꼬마 황소는 금세 쟁기로 밭 가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전쟁에 뛰어든 군인들도 한때는 이렇게 꿈과 호기심으로 세상을 채워가던 소년이었겠죠.


소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담배를 다 피운 주인들이 다가와 고삐를 쥡니다. 꼬마 황소는 앞장서 가는 것에 신이 나있고 할머니 소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그러다 들판에 한눈을 파느라 소의 걸음걸이가 느려지자 주인의 회초리가 날아오죠. 아파하는 꼬마 황소에게 할머니 소는 '우린 가끔 이렇게 두들겨 맞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에요. 사실 할머니 소의 마음도 따갑도록 서럽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자연스 저항보다는 순응을 먼저 말하게 되는 거죠. 이 이야기가 최초 발표된 시점을 고려했을 때, 이런 조언은 당시로선 굉장히 현실적인 겁니다. 매를 맞고 힘껏 앞으로 달려 나가는 소들의 모습은 사실 그 시절에 '산업화를 견인하는 역군'으로 칭송받던 '노동자'의 모습이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책은 평화와 더불어 노동자의 삶에 대해서도 비유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거죠.


"할머니, 하지만 난 언제부터인지 둥둥 떠가는 흰구름도 보고 싶고, 먼 산봉우리도 보고 싶고, 자꾸자꾸 한눈을 팔고 싶어졌어요. 수레가 무거우면 그렇고 일이 고달플 때마다 그랬어요."
꼬마 황소의 말에 할머니 소는 어느새 입술을 실룩실룩, 그만 두 눈자위에 눈물이 삼빡거렸습니다.

(33쪽)


할머니 소는 순응하는 삶의 지혜를 말하지만, 꼬마 황소는 일이 고달플 때마다 다른 꿈을 꿉니다. 시대가 달라졌으니까요. 때마침 고갯길의 들국화 향기가 소들을 위로하듯 다가옵니다. '우린 가끔 두들겨 맞아야 한다'는 할머니 소의 말은 분명 시대착오적인 데다가 위악적인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따뜻하게 느껴지죠. 사랑하는 꼬마 황소를 위해 아픈 마음을 딛고 담담히 조언을 건네는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할머니 소는 앞으로도 꼬마 황소의 삶을 묵묵히 바라보며 응원하겠죠. 아마 작가가 이 책을 읽는 어린이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도 그런 따뜻한 시선을 동반한 응원일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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