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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an 26. 2021

지는 것의 의미

은소홀, 『5번 레인』, 문학동네, 2020

* 쪽수: 240쪽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5번 레인』 보았습니다. 표지 디자인에서 짐작할 수 있듯 수영하는 어린이들의 이야기이고요. 주인공 강나루는 한강초 수영부의 에이스입니다. 승부욕이 강하고 실력도 뛰어나지만 최근 라이벌인 푸른초의 김초희에게 순위가 밀려 자존심이 많이 상해 있죠. 이야기는 전형적인 성장담인데, 익숙하긴 해도 마냥 진부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수영 대회에서 4번 레인은 우승 후보가 차지하는 자리입니다. 예선에서 1등을 한 선수가 본선에서 4번 레인에 서는 식이죠.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인 '5번 레인'은 '2등'을 상징합니다. 이 이야기는 승부에서 '지는 것의 의미'를 말하고 있어요.


"나루야, 코치님은 이기고 지는 게 수영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시합은 이기려고 하는 거잖아요. 저는 이기고 싶어요."
코치님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 평생 이기는 시합만 하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어. 누구나 질 때도 있는 거야. 어쩌면 어떻게 지느냐가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해." (47-48쪽)


나루는 초희에게 진 시합을 복기하는 평가회에서 엉뚱하게도 초희의 반짝이는 선수복을 문제 삼습니다. 실력으로 졌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 거예요. 이후 연습 시합에서 나루는 초희에게 한 번 더 지게 되고, 탈의실에서 초희가 승리의 부적으로 여기는 그 반짝이는 선수복을 훔쳐오죠.


이야기는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부에 스타트, 턴, 터치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데, 서사의 전체 흐름과 잘 어울리는 프레임입니다. 1부 스타트에서는 수영부원인 주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소개하고, 그 안에서 주인공 나루의 존재감을 인상 깊게 각인시킵니다. 수영부 6학년인 승남, 사랑, 동희, 세찬, 태양, 나루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모두 매력적이고, 개성이 뚜렷하고, 무엇보다 건강합니다. 스스로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건강한 어린이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감동적이죠.


2부 턴에서는 말 그대로 이 이야기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가지 중요한 플롯이 있어요. 하나는 전학 온 태양이가 나루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나루가 라이벌 초희의 선수복을 훔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작품의 중요한 메시지는 이 두 플롯이 충돌하거나 어긋나면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지요. 나루와 태양이는 잘 맞는 한쌍이고 충분히 건강하고 건전한 방식으로 교제를 이어갈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인데, 그 관계를 가로막는 건 다름 아닌 나루 본인이에요. 초희의 선수복을 훔친 나루는 내내 무거운 돌덩이 하나를 마음에 달고 훈련에 임할 수밖에 없죠.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나루는 소중한 친구 앞에서도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위축되고 맙니다.


3부 터치에 오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루가 어떤 용기 있는 결정을 하고 행동에 옮기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얽힌 매듭이 풀리는 과정에서 나루가 그토록 매달리던 '승부'를 대하는 태도에 어떤 변화가 찾아오는지도 볼 수 있고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6학년 학생이 혼자서 감당하기엔 버거워 보이는 감정의 무게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나루를 어느새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영화를 보는 것과 비슷한 몰입감이 있어요. 그 정도로 익숙하고, 마지막까지 감동적입니다.


코로나며 미세먼지로 활동이 제한되는 일상을 긴 시간 이어오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주는 청량감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물에 잠기거나 물살을 가를 때의 느낌, 잔잔한 물결에 내 몸을 맡길 때의 평온함, 수영장 특유의 냄새와 파랗게 투명한 물 아래로 보이는 타일 같은 이미지가 마음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그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터치패드를 향해 나아가는 건강한 어린이들의 모습까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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