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Feb 11. 2021

장르와 인간 사이, 따뜻한 귀신 이야기

최주혜, 『귀신 감독 탁풍운』, 비룡소, 2019

* 쪽수: 136쪽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소재가 뭘까요. 물론 어린이마다 다르겠지만 경험상 똥 이야기와 귀신 이야기가 평균적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기본적인 설정과 구조를 파악하기도 전에 본능적 호기심과 두려움이 먼저 발동하죠. 다른 소재의 이야기는 몰입을 이끌어내기까지 작가나 구연자의 매우 섬세한 노력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은데 똥과 귀신 이야기는 그 점에서 강력한 비교우위를 갖습니다.


(어린이가 좀 크면 너무 유치한 이야기는 안 읽으려고 할 것 같지만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똥과 귀신이 커버할 수 있는 연령대는 생각보다 넓습니다. 서사의 전개 방식에 따라 호불호가 있는 것이지, 소재 자체가 유치해서 책의 매력이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됩니다.)


『귀신 감독 탁풍운』이 제7회 비룡소 스토리킹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킹은 어린이 심사위원이 뽑는 장르문학상이거든요. 만약 이 작품을 창비 좋은 어린이책이나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에 응모했다면 주목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어린이 심사위원이 직접 주는 상이라면 다르죠. 그만큼 직관적으로 확실한 재미를 보장하는 작품입니다. 이렇듯 스토리킹이라는 상의 의미는, 작가가 염두에 두었을 주 독자층의 일부가 표본으로서 심사에 참여하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이 장르문학의 활성화라는 관점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고요.


'탁풍운'은 귀신을 감독하는 신선이 되고자 하는 신선 후보생입니다. 천계에서 삼백 년간 수행을 마치고 인간계로 내려왔죠. 이제 '조 신선' 밑에서 삼 년간 추가로 실전 경험을 쌓으면 풍운도 신선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습 기간이 끝나갈 무렵, 풍운은 악귀에게 귀신 출석부를 빼앗기고 맙니다. 귀신 출석부는 신선이 인간계의 귀신을 다스리는 데 반드시 필요한 물건입니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풍운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출석부를 되찾아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구조가 워낙 단순해서 책과 친하지 않은 어린이도 곧잘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죠.


읽고 나서 생각해봄직한 주제가 몇 가지 있긴 한데, 사실 귀신 이야기만 몇 시간씩 해도 충분히 좋은 독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책을 매개로 하여 어린이가 좋아할 만한 대화를 즐겁게 나누는 것만으로도 독서에 대한 호감을 크게 늘릴 수 있으니까요. 옛날 귀신 이야기나 세계 각국의 유령, 괴물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것도 근사하겠죠. 물론 어린이가 너무 커다란 공포를 느끼지 않는 선에서요.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악귀로 등장하는 '구타귀'와 '두억시니'는 각자 살아생전에 원한이 생기기에 충분한 사연을 갖고 있어요. 구타귀는 얻어맞아 죽어 악귀가 되었고, 두억시니는 부잣집 잔치에 밥을 얻으러 갔다가 머리를 맞아 죽어 악귀가 되었습니다. 그 사연이 길고 자세하게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런 불의가 언급된 이상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작업이 형식적으로라도 꼭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악귀들은 한을 풀지 못하고 결말부에서 주인공 일행에 의해 그냥 처치되어 버려요.


예를 들어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에서 김동욱이 그토록 억울한 죽음 끝에 무시무시한 원귀가 되었는데 하정우, 김향기, 주지훈의 협공으로 영원히 소멸된 채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해보세요. 올바르게 매듭지은 결말이라고 느낄 수 없겠죠. 해피 엔딩이냐 새드 엔딩이냐 이전에, 결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불행한 과거가 언급되었으면, 어떤 식으로든 그걸 해소할 기회도 주어져야 공평하니까요. 하지만 『귀신 감독 탁풍운』에서 구타귀와 두억시니는 반성이나 화해는커녕 후회 한 번 해볼 기회조차도 갖지 못한 채 소멸해 버립니다. 이럴 거면 악귀들의 불행했던 과거도 굳이 언급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영화 <전우치>를 보면 거기선 딱히 요괴에게 감정 이입할 사연이 안 나오잖아요. 그렇게 해도 얼마든지 이야기는 되거든요.


그럼에도 이 작품은 여전히 어떤 온기를 품고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앞서 소개한 악귀 외에도 '구멍귀'라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귀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생전에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다 간 귀신입니다. 미등록 이주민의 자녀와 부모로부터 버려진 어린이들이 자신의 이름도 잊은 채로 구멍귀가 되어 인간계를 떠돈다는 설정은, 비현실과 초자연에 뿌리내린 장르물도 동시대의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사실 장르적 쾌감을 추구하는 건 인간과 세계에 관심을 갖는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거든요. 다른 모든 분야의 예술이 그런 것처럼요.

매거진의 이전글 지는 것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