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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21. 2021

어린이와 페미니즘

정주영, 『4학년 2반 뽀뽀 사건』, 현북스, 2019

* 쪽수: 128쪽



세상에는 아무리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고 해도 아름다운 은유와 동화적 장치로 예쁘게 장식하기 곤란한 주제가 있습니다. 사회의 주요 의제이면서 어린이들이 처음부터 기본적 이해를 튼튼히 다져야 하는 주제가 특히 그렇습니다. 오늘날 '페미니즘'이 바로 그런 주제죠. 페미니즘은 21세기의 한국, 그리고 세계에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이슈입니다. 누군가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회를 리드하는 이슈는 일부 적대적인 집단의 이해와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정주영의 동화 『4학년 2반 뽀뽀 사건』은 페미니즘을 직선적으로 다루는 작품입니다. 성폭력과 2차 가해, 그로 인해 위축된 피해자의 자기 검열과 같은 문제를 곧게 응시하고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야기는 미교초등학교의 4학년 2반에서 일어나는 스캔들로부터 촉발된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는데, 사실상 어른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문제를 어린이들의 세계에 일대일로 대응시켜 재현해낸 결과물입니다. 복잡한 문학적 기법을 동원하지 않고 은유적 장치로 해석될 여지도 거의 주지 않는, 단단한 현실의 이야기입니다. 선 굵은 플롯 하나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관통하며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아직까지 한국의 기성세대는 논쟁적 이슈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터도 그요. 어린이들에게 굳이 이런 것까지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얘기는 아예 통째로 들어내면 간단하거든요. 어른의 개인적 신념을 어린이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할 위험도 없어지고요. 그러니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에 대해 섣불리 주관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일면 필요하고, 경우에 따라선 현명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도를 가지고 특정 이슈를 지속적으로 회피하거나 적당히 둘러대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사실 어른이 자 견해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어린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주제와 관련된 용어와 개념을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쉽게 풀어주는 역할까지만 하고, 판단은 어린이의 몫으로 남겨두면 돼요. 때로 설명 자체에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보통 그것 때문에 대화가 단절되지는 않습니다. 어린이들도 저마다 자기 생각이 있어서 개념을 수용하고 해석하는 방식도 다 다르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4학년 2반 뽀뽀 사건』이 담고 있는 주제에 대해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보수적인 관성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맥락 없이 조기에 차단당하는 어린이들이 정말 많습니다. 페르 홀름 크누센의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1971)의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 선정을 둘러싼 논쟁의 많은 부분이 '조기성애화'나 '동성애 옹호', 내용의 '선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을 떠올려 보세요.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불건전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죠. 『4학년 2반 뽀뽀 사건』은 성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어 결은 다르지만, 사회의 인식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를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 우리 사회가 훨씬 생산적인 담론을 끌어낼 수 있었고, 그래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논란의 핵심은 이 책에 포함된 언어적 표현과 삽화가 공교육에서 다루기에 적합하냐는 것이었고 저는 그 문제의식에 일부 동의하는 입장이었는데, 어느 순간 자극적인 슬로건이 공론장을 단숨에 장악해버렸고 일은 급하게 수습되었죠. 아쉽게 생각합니다.)


『4학년 2반 뽀뽀 사건』을 읽고 어린이와 대화를 나눈다면, 우리는 이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을 언급해야만 합니다. 그 과정을 적당히 우회하려는 모든 시도는 창작자를 존중하는 방식도 아닐뿐더러 올바른 독서지도 방법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엄격하고 근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요. 그저 책 속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며, 어느 쪽에 서서 건강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에 대해, 담백하면서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면 됩니다. 그럼 이야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미교초등학교 4학년 2반 학생 '신지아'를 둘러싼 루머가 돌게 된 건 '지아와 뽀뽀. 짜릿, 떨림.'이라고 적힌 한 장의 쪽지 때문이었습니다. 의미 없이 파편화된 낱말들을 짜 맞추고 살을 붙여나가 한 편의 스캔들로 완성시킨 건 어처구니없는 뜬소문이었습니다. 제우와 현웅이는 지아가 예찬이와 사귀다가 서준이에게로 마음이 돌아섰다는 내용의 소문을 퍼뜨립니다. 단짝 혜주에게 그 소문을 전해 들은 지아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지만 일은 지아의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죠. 다음날부터 친구들은 지아에게 뽀뽀하라고 입을 모아 외치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냐며 그래도 양다리는 너무했다고 놀려 상처를 줍니다. 이제 지아는 치마가 짧다는 엄마와 선생님의 말을 평소처럼 가볍게 흘려 넘길 수 없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봐."
"네가 뭘?"
"나도 모르겠어." (28쪽)


이후 잘못된 소문을 바로잡기 위한 지아의 노력은 엉뚱하게도 남자 대 여자의 대결로 번지고 맙니다. 친구들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대신, 2차 가해로 분산된 책임을 앞다투어 회피하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처음 소문을 퍼뜨린 람이 직접 사실대로 말해달라' 지아의 요청을 듣고 제우는 현웅이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남자애들이 문제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거 진짜 싫어!" 소문의 피해자를 가해자로 모는 익숙한 프레임이죠.


지아는 친구 혜주와 윤슬이의 도움으로 소문을 역추적하기 시작하고, 이내 쪽지로부터 시작된 소문의 내막을 알게 됩니다. 제우는 쪽지에서 본 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지아가 상처를 받았죠. 이제 제우와 현웅이, 그리고 소문에 함께 등장했던 예찬이와 서준이까지 한 팀이 되어 문제 해결을 위해 힘을 모으게 됩니다. 한 번 퍼져버린 소문을 바로잡을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중요한 건 진실을 밝히고 성폭력 피해를 회복하는 데에는 피해자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건전한 연대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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