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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r 01. 2021

소년이 전쟁을 살아내는 법

현길언, 『전쟁놀이』, 계수나무, 2001

* 쪽수: 144쪽



현길언의 동화 『전쟁놀이』는 8·15 광복을 1년 남짓 앞둔 시점의 제주도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일곱 살 소년 세철이의 관점에서 펼쳐집니다. 시대적 비극을 다루는 작품에서 무구한 소년의 관점을 택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비극을 더 비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죠.


(우리는 현실에서 아무리 거대한 비극이 일어나더라도 어린이들만은 그 비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기를 소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다분히 비현실적이더라도 말이죠.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의 한복판에서 비극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소년의 관점은, 그런 불행한 소년이 실제론 전혀 없었기를 바라는 비현실적 소망에 포개어지며 더욱 짙은 호소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야기에선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누구의 것이냐에 따라 똑같은 일이 필연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기이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 현상이 전쟁이나 차별과 같은 주제를 담고 있을 때 해맑은 어린이의 관점은 매우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되죠. 폭력을 정당화하는 복잡다단한 메커니즘의 비중은 극도로 미미해지고 대신 어린이 특유의 단순 명료한 해석이 주가 되는 겁니다. 존 보인John Boyne의 소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2006)에서 묘사된 비극성을 떠올려보면 이런 관점이 갖는 설득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일곱 살 세철이는 국민학교 입학을 앞두고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집안 식구들은 장난꾸러기 세철이를 학교에서 받아주기나 하겠느냐며 무심하게 굴지만 속마음으로는 막둥이 세철이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과 고모가 함께 사는 세철이네는 마을 농민들에게 일할 소를 빌려주고 그 대가로 품을 받는 부잣집이기도 하죠. 여기에 읍내에 사는 삼촌과 삼촌의 친구 고선생도 세철이에겐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요즘 시대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대가족의 정겨운 일상에 대한 묘사는 그 시절의 목가적인 풍경과 가족 내에 흐르는 소탈한 행복감을 한껏 강조합니다.


1학년이 된 세철이는 어느 날 학교에 임시로 주둔하게 된 일본군을 보고 그들을 동경하게 됩니다. 지휘관의 구령에 맞추어 훈련하는 군인들의 동작을 따라 하는 모습에서 그런 순진한 동경심이 묻어 나오죠. 삼촌과 고선생에게 일본군 징집영장이 나온 날, 가족 모두 침울해진 분위기에도 세철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속으로 기뻐합니다. 일본군에 입대한 자랑스러운 삼촌 덕에 세철이는 동네 친구들과의 전쟁놀이에서 자연히 일본군 대장 노릇을 하게 되죠. 일본군과 미군으로 갈라져 싸우는 전쟁놀이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건 언제나 세철이가 이끄는 일본군입니다. 물론 전쟁놀이에선 이기든 지든 아무도 죽지 않지만 현실의 전쟁은 다르죠. 떠났던 삼촌은 어느 날 유해가 되어 돌아옵니다.


이른 나이에 전사한 삼촌의 양자가 되어 장례를 치른 세철이는 해방 직전까지도 삼촌의 죽음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삼촌의 유해는 마을의 일본군 신사에 안치되고, 학교 교무실 앞 복도 게시판에는 삼촌의 액자 사진이 걸립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오랜 시간 길들여진 마을 사람들은 삼촌의 죽음을 자랑스러운 희생으로 떠받들죠. 하지만 거짓말처럼 찾아온 해방의 시기에 세철이는 초라하게 내동댕이쳐진 삼촌의 사진을 품에 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동안 믿어왔던 것들이 일거에 허물어지는 순간 느껴야 했을 감정이란, 여덟 살 세철이에게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을까요.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통치를 경험하고, 그 이후로도 여러 번 굴곡진 현대사를 거쳐온 나라에서 이런 이야기를 쓰고 읽는 데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간혹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세대의 각론을 뛰어넘어 한 국가의 근저에 흐르는 정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전쟁놀이』를 읽는 한국인의 느낌은 개인차를 감안한다고 해도 외국인의 그것과는 좀 차이가 있을 것 같거든요. 세철이가 살던 나라와 지금의 한국을 잇는 가늘고 질긴 끈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민해보게 되죠. 정답은 없겠지만,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무언가 숙연해지게 만드는 힘이 역사에는 분명 존재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역사의식이 때로 지식으로서의 역사보다도 더 중요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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