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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pr 23. 2021

예리하고 따뜻하게

이현, 『연동동의 비밀』, 창비, 2020

* 쪽수: 240쪽



『연동동의 비밀』은 총 4개의 에피소드와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로 구성된 추리 동화입니다. 추리 동화의 형식이 어린이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사건을 파헤칠수록 고조되는 긴장감과 서사의 논리적 구조에 있겠죠. 잘 짜인 추리소설이 성인 독자들에게 두뇌 게임의 스릴을 제공하는 것처럼요. 이 책 또한 그러한 형식적 장점과 완성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1화에서는 주인공 '우정효'가 연동동의 할머니 댁으로 혼자서 이사 오게 된 배경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죠. 할머니 댁 3층 테라스에서 낯선 동네의 밤 풍경을 둘러보던 정효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큰 개가 짖는 소리, 질주하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를 듣게 됩니다. 곧이어 자동차 헤드라이트 앞에 위태롭게 뛰어드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 놀라죠. 끔찍한 사고를 직감한 정효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텅 빈 거리는 거짓말처럼 고요합니다. 하지만 곧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오고 다음날 정효는 집 근처 골목에서 방화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미스터리의 시작을 알리는 흥미로운 출발점입니다.


12살 정효가 4화에 걸쳐 연동동의 비밀을 하나씩 밝혀내는 과정은, 전학 온 학교에서 새로 알게 된 '김신주', '강인찬' 두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보다 입체적인 색채를 게 됩니다. 그중 강인찬은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장애인이에요. 이런 설정에 별달리 주목할 이유가 없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우리 사회의 여건이 그렇지 않죠. 이 책은 장애인이 겪는 차별과 편견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이야기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더 눈에 띄는 거죠. 저는 장애를 중심 테마로 다루지 않는 작품들에서 장애를 지닌 캐릭터가 지금보다 훨씬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흔하고 당연해서 따로 언급할 필요도 못 느낄 정도로 말이에요. 그리고 그건 다른 종류의 소수자성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겠죠.


1화의 방화사건은 전적으로 정효의 기억에 의존하여 풀려나갑니다. 사건이 있던 날 밤, 사건과 관련된 유력한 정황을 직접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정효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이 동네에는 최근 흉흉한 일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의 주범으로 보이는 방화범을 찾아내는 일이 오롯이 정효의 기억과 추리에 달린 거죠. 사실 첫 에피소드는 논리 구조의 치밀함보다는 정효의 기억 속 이미지를 재생하기 위한 우연적 조건의 배치에 훨씬 더 공을 들였는데, 그건 아마 도입부에 주인공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일 거예요.


2화는 정효네 반 담임 선생님이 학생 온라인 단체 채팅방을 금지하면서 시작됩니다. 이건 실제로 초등학교에서 학기 초 회의를 통해 종종 만드는 규칙 중 하나입니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극심한 언어폭력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건데 일반적으로 권장되는 방법은 아니에요. 폭력으로부터 모두를 보호하는 건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정작 어린이들이 윤리의 객체로 밀려나게 되니까요. 스스로 실천하는 윤리의 효능감을 경험할 수 없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2화에서 담임 선생님이 단톡방 금지령을 발표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죠. 같은 반 친구 '한아름'이 이미 단톡방에서 학교폭력을 당하고 있었던 거예요.


반 친구들 몇몇은 선생님께 단톡방의 실상을 제보한 '배신자'를 찾아내려 눈에 불을 켭니다. 정효도 제보자를 찾기 위해 추리를 시작하지만 찾는 이유는 다릅니다. 호기심 반 걱정 반이죠.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진 폭력을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데에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을 테니까요. 그런 용감한 친구를 배신자로 취급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결국 2화는 정효가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제보자를 찾기 위해 비밀리에 단서를 추적하는 이야기인 거죠. 그 과정에서 친구들의 천연한 반응을 도구 삼아 무심하게 벌어지는 폭력의 민낯을 드러내어 묘사한 점은 이 에피소드에서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장점 중 하나입니다.


3화에서는 두 개의 플롯이 교차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할머니 댁 1층에 새로 온 세입자 '남은정'의 친모를 찾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주네 옆집에 사는 진돗개 '눈송이'를 다치게 한 범인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남은정은 아기 때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마흔넷의 나이에 친모를 찾으려 한국에 왔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은 희미해졌고 남은 건 흐릿한 사진과 엄마의 편지뿐이죠. 할머니와 친분이 있는 연동동 이웃들이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는 동안 정효와 친구들은 진돗개 눈송이를 공격한 사람을 추리합니다. 송이가 사는 집과 마당의 구조를 고려하면 외부에서 송이를 다치게 할 만한 요소를 찾기는 쉽지 않아요. 그렇게 어렵사리 추리를 이어가던 어느 날, 송이네 집에 방문한 정수기 코디가 열어놓은 대문 안쪽으로 들어선 정효와 신주는 마당에서 깨진 화분과 피 묻은 망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단서를 계기로 신중하게 조사를 이어나가던 중 훨씬 더 경악스러운 일이 일어나죠. 마당에서 사람의 유골이 나온 거예요. 동화에서는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운 사건이죠. 그래서 더 인상적이기도 하고요. 어쨌든 이 사건은 3화의 플롯을 매듭지으면서 자연스럽게 4화로 넘어가는 브릿지 역할을 해줍니다.


마지막 4화에서도 플롯은 둘로 나뉘어 흘러갑니다. 그중 하나는 송이네 집 마당에서 발견된 유골에 얽힌 옛 사연을 추적하고, 다른 하나는 정효 아빠의 죽음에 얽힌 과거를 향하고 있죠. 사실 정효가 처음부터 엄마를 따라 캐나다에 가는 대신 혼자서 연동동에 오기로 결정한 건 아빠의 죽음에 대한 의문 때문이기도 했거든요. 이 의문은 사라진 아빠의 자전거를 찾는 여정의 끝에서 해소됩니다. 그러는 중간중간에도 유골의 정체를 둘러싼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이 계속해서 이어지고요. 에피소드가 쌓여갈수록 단계적으로 고조되는 긴장감, 그리고 주인공이 가진 의문의 시작점이자 도착점으로서 연동동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함축성, 개별 사건들의 막을 열고 가시화된 단서를 따라 추리를 완성한 뒤 매듭짓는 방식까지 두루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수작입니다.


앞서 작품 속 4개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있다고 했죠. 이 책은 소외된 이웃, 증오 범죄, 스토킹 범죄, 장애인 인권, 학교폭력, 동물 학대, 입양아 수출, 가정폭력, 가족 간 불화 등 결코 가볍지 않은 동시대의 이슈들을 ―저마다 비중은 다르지만―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시종 건강하고 따뜻하고 명랑하게 활로를 모색합니다. 전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가는 방식 자체가 바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메시지라고 생각해요. 이 책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관점으로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어린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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