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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n 23. 2021

사라진 동물들의 악몽

다비드 칼리, 클라우디아 팔마루치,『그림자의 섬』, 웅진주니어, 2021

* 쪽수: 64쪽



흐릿한 글씨로 새겨진 제목이 인상적인 책입니다. 그늘진 숲, 어두운 색감의 나무들 사이로 글자들이 사라지고 있는 듯 보이죠.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합한 디자인에 작품의 핵심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최근 이런 시도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고, 구체적인 기법도 굉장히 다양해지고 있어요. 분과로서의 예술 영역이 점차 통합·확장되는 흐름 위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작업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그림자의 섬』은 비인간 동물의 멸종을 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물은 모두 멸종 위기에 있거나 이미 멸종했다고 해요. 책에 묘사된 일러스트가 어둡고 침울한 데다가 때때로 섬뜩하고 기괴하게까지 보이는 건 그래서겠죠. 어쩌면 이제 동물들의 삶을 무지갯빛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는 건 어린이에 대한,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기만일지 모릅니다. 물론 그렇게 그리면 보기에는 좋겠지만, 이건 생명과 삶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생명은, 그리고 자연은 관상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죠.


대화할 거리가 참 많은 책입니다. 책 맨 앞장이나 맨 뒷장을 열면 멸종된 동물들의 삽화가 격자 위에 영정처럼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 동물들이 언제 어디에서 살았고, 어떻게 멸종되어 갔는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며 이야기 나누는 건 어떨까요. 아마 어수록 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직관적이고도 분명하게 찾아낼 겁니다. 어린이의 시선으로는 다른 결론이 있을 수가 없는 문제거든요.


책의 속표지에 삽입된 그림은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힉스의 <노아의 방주>(1846)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여호와의 에 따라 자신의 방주에 비인간 동물들을 암수로 짝을 지어 태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그림에서는 똑같은 동물들이 한 마리씩 쓸쓸하게 공장 같은 화물선―인간의 탐욕을 상징하는―에 오르고 있어요. 이대로 출항하면 모두가 절멸할 것이 뻔한데도 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는지, 남겨진 대안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것도 좋겠죠. 이제 줄거리를 살펴볼까요.


숲 속 '꿈의 그늘'에 사는 동물들은 모두 악몽을 꾸고 있습니다. 거대한 발에 짓밟히는 꿈, 기어 다니는 괴물이 나타나는 꿈, 시커먼 어둠에게 밤새 쫓기는 꿈, 사나운 고함에 시달리는 꿈. 동물들을 괴롭히는 악몽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다행스럽게도 숲에는 뛰어난 의사인 '왈라비 박사'가 있어 환자들의 악몽을 치료해줍니다. 왈라비 박사가 사용하는 치료법은 '악몽 사냥 설명서'라는 책에 나와 있는데, 이게 아주 기발합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주로 인간이 동물을 꾀어 고통을 줄 때 사용하는 수법이기 때문이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악몽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을 끔찍한 불안에 시달리게 했던 악몽은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교묘한 덫과 함정, 두려움을 유발하는 온갖 도구들을 그들 자신에게 되돌려줌으로써 영원히 사라져 주길 바라는 마음이 '악몽 사냥 설명서'를 통해 드러난 거죠. 왈라비 박사는 설명서에 따라 동물들의 악몽을 하나씩 치료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요.


'테즈메이니아주머니늑대'는 조금 색다른 악몽을 꾸는 환자입니다. 꿈을 꾸면 깊고 깊은 곳에서 가만히 웅크린 어둠만 보인다고 하죠. 왈라비 박사는 흔한 악몽, 특이한 악몽, 희귀한 악몽을 다룬 책을 모두 살펴보지만 어디에도 치료법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테즈메이니아주머니늑대가 멸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라진 동물들의 꿈에 그토록 아득하고 막막하고 공허한 어둠이 내려앉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저릿하게 아파옵니다.


왈라비 박사는 테즈메이니아주머니늑대를 세상에 없는 동물의 영혼이 모여 사는 섬에 데려갑니다. 동물들이 회색빛의 그림자가 되어 떠도는 섬에 도착한 테즈메이니아주머니늑대가 묻습니다.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나요?" 그리고 왈라비 박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아무도…… 알 수 없지요."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질문에 답할 책임은 이제 우리 모두에게 남겨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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