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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l 04. 2021

두 번의 독서로 완성되는 이야기

아드리앵 파를랑주, 『내가 여기에 있어』, 웅진주니어, 2020

* 쪽수: 40쪽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소년의 머리맡에 뱀의 꼬리가 놓여 있습니다. 소년은 곧 이 뱀의 몸통을 따라 모험을 떠납니다. 방문을 지나 창문을 넘어 정원 끝까지 나아갈 동안에도 구불구불한 뱀의 몸통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거대한 뱀의 정체는 무엇이며, 소년에겐 앞으로 어떤 여정이 펼쳐질까요.


『내가 여기에 있어』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한 소년의 궁금증에서 출발합니다. 처음에 소년은 뱀의 몸통을 손가락으로 세게 꼬집어 봅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뱀의 비명은 소년을 집 밖으로 나서게 만들죠. 소년의 목적지는 뱀의 머리입니다. 두 개의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된 뱀의 텅 빈 몸통은 소년이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할 단 하나의 경로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길만 죽 따라 걸으면 소년은 반드시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거죠.


심플하고 직선적인 이야기입니다. 결말을 확인하기 위해 달려간다면 아마 책을 덮기까지 채 5분도 걸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야기의 진짜 의미는 보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 소년은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동굴 속에서 뱀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뱀은 소년을 반가워하며, 그동안 친구도 없이 혼자 있었다고 말하죠.  말을 들은 소년은 이렇게 답합니다.


"무슨 소리야. 네 주위에 얼마나 사람이 많은데." (31쪽)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 무관심한 도시의 거리에서, 너는 어떤 연인을 하나로 묶어 주었어. 가냘프고 여린 풀들을 행인들의 발길로부터 보호해 주었어. 누군가에게 비를 피할 우산이 되어 주었고, 지쳐 잠든 여행자의 머리를 받치는 베개가 되어 주었지. 둥지에서 떨어지는 알이 깨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받아 주기도 했어. 너는 토끼들이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느릿느릿 달팽이의 든든한 다리가 되어 주었어. 작은 쥐를 성난 새 떼로부터 지켜 주었고, 그 성난 새 떼를 노리던 무시무시한 이리들을 막아 주었지. 마지막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여우 한 마리가 푹신한 네 몸에 기대어 자고 있어." (32-33쪽)


이야기의 의미가 오롯이 담겨 있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소년이 궁금증을 단숨에 해결하기 위해 목적지로 내달리는 여정을 지나왔다면 외로운 뱀에게 저런 위로를 건넬 수 있었을까요. 독자는 이 대목에서 처음에 휙휙 넘겼던 앞쪽의 그림들로 돌아가 구석구석 자세히 살펴보게 됩니다. 소년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말로 저런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요. 이렇게 두 번의 독서가 온전히 이루어져야 비로소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목표를 향해 달려온 독서, 두 번째는 과정을 찬찬히 돌아보는 독서지요. 이 책은 이렇게 우리가 앞만 보고 달릴 때 놓치게 되는 주변의 온갖 풍경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러면서 과정은 목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일깨우죠.



사람은 누구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때로 목표와 자아를 동일시하기도 하고, 목표에 닿지 못하는 자아를 부정하기도 하죠. 물론 강력한 동기부여는 목표를 달성하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긴 여정 위에 놓인,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한 나'도 나 자신으로서 중요한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그리고 매 순간 앞만 보며 달리다 스가는 주변의 아름다운 것들을 부디 놓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기도 하죠. 이 책의 제목 '내가 여기에 있어'라는 말도 바로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을 테고요. 책과 달리 삶은, 두 번 경험할 수 없으니까요.


(어쩌면 책을 읽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끝까지 읽기 위해, 이야기의 교훈을 찾아내기 위해, 더 많은 책을 더 빨리 읽기 위해 달리는 독서는, 읽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게 합니다. 정말로 좋은 것들을 가슴 깊이 느끼려면 충분히 긴 시간을 들여야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전 이 작품이 책을 해치우는 식의 독서를 하는 어린이들에게 소중한 깨달음을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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