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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l 11. 2021

시선의 방향,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

정진호, 『위를 봐요!』, 현암사, 2014

* 쪽수: 40쪽



정진호의 『위를 봐요!』는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에서 '장애 아동을 위한 좋은 책'으로 선정한 그림책입니다. 여기에 선정된 책들은 당연히 비장애 아동에게도 좋은 책일 텐데, 그럼에도 '장애 아동을 위한' 좋은 책의 목록을 따로 만드는 이유가 있습니다. 흔히 좋은 책으로 소개되는 작품들이 어떤 장애 아동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거든요. 이야기 속 인물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 이야기가 전제하는 세계관이 다수의 경험적 사실만을 근거로 구축된 경우에 특히 그렇죠. 이를테면 어떤 장애 아동은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이 이야기에는 장애를 지닌 캐릭터가 하나도 없지?' 결국 장애와 비장애의 피상적 경계를 넘어 모든 어린이 독자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이런 분류 작업이 더욱 필요해지는 거죠.


이야기는 평범한 일상을 바라보는 소수자의 시선을 인상적인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도입부의 한 면을 제외하고는 모든 페이지의 일러스트가 부감으로 묘사되어 있어요. 이렇게 높은 곳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시점 쇼트는 흔히 전지전능한 인물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방식이죠.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 시점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수지'의 시선에 정확히 포개어집니다. 수지는 창문 밖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출처] 그림책 박물관


이야기는 부감 쇼트의 효과를 거꾸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어떤 인물을 부감으로 주목하고 있다면, 그건 시선 끝에 위치하는 대상의 무력감을 강조하거나 운명론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도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크린 밖에서 인물을 관찰하는 관객은 자연히 그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절대자의 시선을 공유하게 되죠. 그런데 이 작품에서 수지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평범한 어린이예요. 눈에 들어오는 흑백의 거리 풍경 중 수지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죠. 이 이야기에서 부감 쇼트는 가장 약한 인물의 시선으로 치환됩니다. 그렇다면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 또한 운명론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란 뜻이 되겠죠. 그들의 삶은 그들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요.


거리가 무채색으로 표현된 것도 이 이야기를 돋보이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앞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수지는 존재 자체가 지워진 것과 다름없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 우리 사회에는 정말로 장애인이 없다는 듯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요. 이제는 법과 제도를 수립하거나 도시 환경을 설계할 때 장애인의 권리와 복지와 편의를 의무적으로 고려하도록 되어 있지만, 정작 사람들의 의식 구조와 문화적 기반은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 사회의 풍경을 각양각색의 어울림으로 묘사하는 건 형용모순이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현실은 반드시 변합니다. 묵묵히 거리를 지켜보던 수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기에 있어요. 아무라도 좋으니……
위를 봐요!


이 부름에 한 소년이 응답합니다. 이전까지 머리 꼭대기만 보이던 거리에 드디어 한 소년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수지가 거리에 내려올 수 없는 사정을 듣고 난 소년은 그 자리에 팔다리를 펴고 눕습니다. 이제 수지의 눈에는 머리 꼭대기가 아니라 소년의 얼굴과 몸 전체가 들어오죠. 지나가던 사람들도 소년의 시선을 따라 하나둘 가던 길을 멈추고 누워서 위를 봅니다. 거리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집니다. 수지와 온몸으로 마주 보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풍경은 정말로 아름답고 뭉클하죠. 사실 이 사람들이 위를 보지 않았다고 해도 딱히 뭐라고 비난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한 명의 약자를 위해 다수가 기꺼이 불편을 무릅쓰는 이 장면이 더 소중한 것이고요. 삶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순간이란 바로 이런 장면 속에 있지 않을까요.


책의 결말에서는 수지도 사람들과 함께 위를 바라봅니다. 수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물론 독자가 있죠. 그러니까 이 책에서 의미 있는 눈맞춤은 이야기 속 인물들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책을 읽은 독자가 부감 쇼트의 관찰자로만 남아선 안 되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이 작품이 채택한 '약자의 시선'이라는 형식은 더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약자라고 해서 그 시선이 갖는 힘까지 약한 것은 아니겠죠. 책은 독자를 깊이 응시하고는 가만히 말을 건넵니다. 우리의 시선은 지금 어디를 향해 있고, 또 어디를 향해 가야 할까요.


마지막 장의 그림에서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다만, 의미 있는 눈맞춤이 일어난 거리의 풍경은 이전처럼 쓸쓸하지만은 않습니다. 작고 여린 색깔들이 새싹처럼 곳곳에서 피어나고 있죠. 이토록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번지고 번져 세계를 무지갯빛으로 가득 채울 때까지, 이 책이 꾸준히 주목받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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