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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l 28. 2021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니야

남유하, 『나무가 된 아이』, 사계절, 2021

* 쪽수: 116



남유하의 동화집 『나무가 된 아이』에는 여섯 편의 매혹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야기들은 때로 서늘하고 때때로 오싹하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온기를 품고 있습니다. 책에 실린 작품의 제목은 차례대로 「온쪽이」, 「나무가 된 아이」, 「뇌 엄마」, 「착한 마녀의 딸」, 「구멍 난 아빠」, 「웃는 가면」이고, 모두 제목 그대로의 이야기입니다. 「뇌 엄마」는 뇌로서만 존재하는 엄마의 이야기이고 「구멍 난 아빠」는 정말로 가슴에 구멍이 뚫린 아빠에 관한 이야기예요. 장르 작가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제목이죠. 예컨대 SF에서는 저런 설정들이 현실의 은유로서만 기능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첫 번째 작품 「온쪽이」는 직접적으로 소수자성을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옛이야기 「반쪽이」의 세계관을 거꾸로 뒤집어서 보여준다는 점이지요. 이 세계에서는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한쪽씩 가진 사람들이 '정상'으로 간주됩니다. 하나씩 있어야 할 신체 부위가 둘씩 있는 사람은 '윰쌍둥이', 또는 '온쪽이'라 불리죠. 여기에는 언어적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온(穩)쪽이'라는 호칭 안에 이미 '편안하고 안정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으니까요. 작품 속 세계관에 따르면 '온전함'이란, 이른바 '비정상'을 규정하는 데 쓰이는 개념이 아닙니다. 윰쌍둥이인 주인공은 시종 혐오와 차별에 부딪혀야 하. 그러니 이야기의 배경을 구체적으로 떠올려본다면 온쪽이라는 호칭은 팔다리를 하나씩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것이어야 말이 됩니다. 윰쌍둥이에게는 '두쪽이' 정도의 호칭이 주어졌을 테고요. 하지만 작가는 어린이 독자를 고려하여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 방식을 택했습니다. 동화에서는 종종 언어적으로 정밀한 개념보다 직관적 이미지가 더 유용하거든요. 덕분에 어린이 독자들은 이 작품이 우리 무의식에 자리 잡은 '정상성'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주인공 '수오'는 윰쌍둥이, 즉 온쪽이입니다. '왼사람'과 '오른사람'으로만 구분되는 세계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수오는 사람들의 편견에 시달리며 외롭게 살아갑니다. 엄마는 '수오 같은 아이가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 말하지만 아빠는 수오가 인생을 편히 살 수 있도록 분리 수술을 시키자고 합니다. 즉 엄마는 세계의 진보를 추구하는 입장이고, 아빠는 개인의 적응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입장인 거죠. 부모님의 다툼을 지켜보던 수오는 수술을 받기로 결심합니다. 인물 간 갈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의 메시지는 곧바로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윤리에 관한 쟁점으로 이어집니다. 차별주의자가 엄존하는 현실에서 생존을 위한 타협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이러한 현실에서 개인이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수술을 받기로 한 수오의 결정을 온전히 그 자신의 독립적 판단에 따른 선택으로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소수자를 어떠한 시선으로 보아야 하고, 또한 보지 말아야 하는가. 이처럼 신체와 정상성에 관한 그로테스크적 변형은 언제나 현실의 문제 인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지요.


이야기는 수오를 시선의 객체로 소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온쪽이」가 독자에게 결정적으로 유의미해지는 지점은 소수자가 스스로 확립한 자아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장면 속에 있어요. 수술 전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간 수오는 그곳에서 또 다른 온쪽이 소녀를 만납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보지만 소녀는 수오를 보고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지요. 이 대목에서 소녀가 정말로 혐오하고 부정하는 대상은 타인의 눈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입니다. 사회의 편견은 생각보다 견고해서 그 안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소수자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오롯이 긍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을 이루는 특징은 대부분 이러저러한 우연적 요소들의 결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그저 가지고 태어날 뿐입니다. 의식적 선택의 산물이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이 제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요소에 의해 휘청이는 것을 보면 불공정하다고 느낍니다. 수오가 타고난 신체의 반쪽을 도려내야 하는 사회, 온쪽이 소녀가 자기혐오에 시달려야 하는 사회는 우리가 상상하는 정의로운 세계의 모습은 아닐 겁니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은연중에 합의한 것으로 보이는 '정상성'이라는 개념 또한 삶의 우연적 요소들에 지나치게 많은 가치를 부여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온쪽이」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리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짧은 이야기임에도 여러 의미 있는 질문과 대답들이 오갈 수 있는 것이죠.


두 번째 이야기는 표제작 「나무가 된 아이」입니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필순이'는 어느 날 교실에서 나무로 변합니다. 필순이를 괴롭히던 '준서'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죠. "진짜 센스 없네. 나무라니." 그러니까 필순이만 다른 생명체로 변한 게 아니었던 겁니다. 2반 현오는 무당벌레가 되었다고 하고 3반 수아는 청설모가 되었다고 하는데, 특이하게도 이 세계의 어른들은 이렇게 변해버린 아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단순히 보지 못하는 걸 넘어서 그런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해요.


나무는 점점 자라 교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그 나무가 필순이라는 걸 알고 있는 반 친구들은 그늘의 영향력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급기야 준서는 필순이의 가지를 부러뜨리며 한껏 위세를 부려보지만 오히려 그런 몸부림에 가까운 행동이 준서의 조급한 심리를 더 잘 드러냅니다. 꺾인 가지에서는 피처럼 붉은 액체가 흘러나오고, 그걸 본 아이들은 적잖이 동요하죠.


이 이야기가 특히 강한 인상을 남기는 건 학교폭력의 피해자와 희생자를 다른 생명체를 통해 은유적으로 나타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희생자를 꽃과 나비로 은유하는 관습에 충분히 익숙하지요. 그보다 핵심은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도 문제의 본질을 외면해버리는 현실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비극은, 위기에 빠진 아이들을 보호하는 일에 누구보다 큰 책임을 느껴야 할 어른들이 마치 처음부터 그런 아이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벌어집니다. 더 큰 비극은 그다음에 찾아오죠. 나무가 된 필순이는 마땅히 받아야 할 위로와 애도를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친구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릇된 과거에 대한 숙고와 반성이 결여된 채로는 건강한 미래를 꿈꿀 수 없죠. 이야기의 결말은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환기시키며 긴 여운을 남깁니다.


「뇌 엄마」는 1인칭 화자 '지아'가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서술된 굉장히 서정적인 SF입니다. 지아의 엄마는 8년 전 교통사고로 모든 뼈와 장기가 부서지는 손상을 입었습니다. 다행히 이 세계에는 사람의 뇌를 분리하여 의식을 보존하는 '이터널 브레인'이라는 서비스가 존재합니다. 덕분에 엄마는 죽지 않고 뇌만 유리관 속에 담겨 지아네 집 거실 한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뇌 엄마'는 기계 장치의 도움을 받아서 보고 듣고 감정을 느끼며 주변 사람과 소통합니다. 몸만 없을 뿐 그 사람의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되는 거죠. 그런데 그걸 정말 이전과 동일한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뇌 엄마는 유리관 속에서 나갈 수 없고, 지아를 안아줄 수 없고, 우는 지아의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고, 제 의지로 삶을 마감할 수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는 해도 제 의지에 반하여 신체를 박탈당한 인간의 정체성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죠. 그렇다면 이야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해집니다. 지아는 뇌 엄마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유를 돌려주기로 결심합니다. 이후 결말부에서 모녀가 나누는 대화, 그리고 이어지는 지아의 독백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감각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어요. SF에서 자주 다루는 소재이고, 결말이 향해가는 방향도 장르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갖는 의미는 제게는 굉장히 커 보입니다.


「착한 마녀의 딸」은 이 책에서 가장 어두운 결말을 지닌 이야기입니다. 동화에서 이런 결말을 택해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린이에게는 슬프고 어두운 이야기를 읽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이야기가 무제한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쟁점도 아니에요. 정말 중요한 건 동화가 기존의 틀에 안주하며 상상 속 독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려 하기보다 끊임없이 실제 어린이 독자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는 사실이죠.


바닷가에 살던 착한 마녀와 딸 '바이올렛'은 숲으로 이사를 옵니다. 숲에는 바이올렛 또래의 다섯 아이들이 있습니다. 바이올렛은 친구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이 마녀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몇 가지 마법을 보여줍니다. 친구들은 차례로 바이올렛을 찾아와 재미 삼아 마법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은밀히 다른 친구의 험담을 하죠. 친구를 사귀고 싶을 뿐인 바이올렛은 험담을 적당히 넘겨 들으며 요구를 들어줍니다. 요컨대 이 이야기는 친구와 우정을 만드는 하나의 '그릇된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몰래 흠집 내는 것을 관계 형성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나 자신이 그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죠. 습관 때문일 수도 있고, 마음이 절박해서일 수도 있고, 단지 관계에 서툰 것뿐일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건 누군가를 배제하고 희생시키는 방식으로는 결코 건전한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에서 다섯 아이는 결국 바이올렛을 제물로 삼아 자기네 관계를 위태롭게 지켜냅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관계가 어떤 파국으로 치닫게 될지 다음 장면을 보지 않고도 선명하게 알 수 있죠.


「구멍 난 아빠」의 화자 '지훈'은 어느 날 목욕탕에서 아빠의 가슴을 관통한 구멍을 발견합니다. 이 구멍은 점도 아니고 상처도 아닙니다. 그냥 뻥 뚫린, 말 그대로 구멍이에요. 처음 봤을 때 손톱만 했던 구멍은 다음에 봤을 땐 아기 주먹만 한 크기로 커져 있습니다. 고민하던 지훈은 아빠에게 구멍에 대해 물어봅니다. 뜻밖에도 아빠는 이미 알고 있죠. 구멍 난 이유를 묻는 지훈에게 아빠는 '꿈을 잃어서가 아닐까'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립니다.


구멍 난 아빠의 사연을 짐작해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지훈의 아빠와 엄마는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되었는데, 아빠가 회사를 그만두고 시작한 사업이 잘 안 풀린 것이 주된 이유로 보입니다. 그런 아빠의 지치고 공허한 마음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도구가 바로 가슴에 난 구멍인 것이죠.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바라보는 어른의 관점이고, 어린 지훈에게는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습니다. 아빠는 정말 저대로 괜찮은 걸까.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떨까. 꿈을 잃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언젠간 나도 가슴에 구멍 난 어른이 되는 걸까. 이렇듯 이 이야기는 익숙한 어른의 관점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당연히 어린이 독자의 마음에 더 깊이 닿을 수밖에 없겠죠. 이 이야기 역시 서글프고 쓸쓸한 결말을 택하고 있어서, 앞서 언급한 '어린이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노력'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 「웃는 가면」은 괴담입니다. 현실을 반영하는 것보다는 장르물 자체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데에 더 많은 공을 들였기 때문에 이 책에서 장르적 특색이 가장 강한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뇌 엄마」와 마찬가지로 1인칭 구어체로 서술된 점도 이 작품의 분위기를 오싹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합니다. 주인공 '나'는 가까운 과거에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전학 온 '수지'는 특유의 아름다운 미소로 단숨에 반에서 주인공이 됩니다. 수지는 하루에 한 명씩 '그날의 친구'를 골라 단짝으로 지냅니다. 재미있는 건 이것이 어린이가 또래 그룹을 형성하는 익숙한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게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전학 와서 다양한 친구를 겪어보거나, 의도적으로 질투심을 유발하거나, 세력을 형성해 존재감을 드러내거나 하는 일들은 수지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수지가 원하는 것은 또래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고, 그런 수지가 갖는 영향력은 적어도 이 교실 안에서는 절대적이죠. 그게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수지가 반에서 '코딱지'라 불리며 왕따 당하는 아이를 그날의 친구로 택하는 장면입니다. 전날의 친구였던 '유민'이 보기에 고결한 수지가 코딱지와 어울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수지에게 관계란 일종의 착취이기 때문에 대상이 누구든 문제될 것이 없죠. 이렇듯 이야기는 관계의 비대칭성을 소재로 삼아 특유의 서늘한 뉘앙스를 인상 깊게 연출해냅니다. 친구들은 수지의 단짝이 되기만을 갈망할 뿐, 동등한 위치에서 우정을 키워갈 마음이 애초에 없어요. 반에서 수지와 단짝이 될 수 있는 특권을 거부하는 사람,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에서 끝까지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은 '미유'뿐입니다.


수지의 아름다운 미소와 권유에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은 미유를 지지하는 이야기일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가 미유의 승리라는 결과에만 주목했다면 이만큼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미유는 그냥 그런 성격을 가진 아이였을 뿐이고, 주인공에게 일어난 일 또한 여러 조건과 욕망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결과에 불과하죠. 이 이야기의 장르적 핵심은 인물들의 관계가 허구적 요인에 기반하고 있고 따라서 독자가 인물들을 꽤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여섯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는 외로움과 쓸쓸함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예민한 시기에 손쉽게 타자로 분류되어 상처 받은 아이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쓸쓸해진 인물들이 건네는 위로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니라는 거죠. 신기하게도 읽고 나면 정말로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위로받은 기분이 듭니다.


그동안 저도 모르게 이런 책을 많이 기다려온 것 같습니다. 어린이 독자에게 장르 이야기의 인상을 깊숙이 남겨줄 수 있는 책 말이에요. 제가 반가움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장르 소설을 축소하고 단순화하기보다, 동화라는 매체의 특성에 맞추어 장르 고유의 매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선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새롭고 기발한 이야기를 찾아가는 어린이 독자에게 이 책은 분명 기억에 남을 독서 경험을 제공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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