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Aug 29. 2021

기나긴 밤들의 연대

루리, 『긴긴밤』, 문학동네, 2021

* 쪽수: 144



『긴긴밤』은 올해 상반기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은소홀의 『5번 레인』과 함께 제21회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공동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지요. 이야기는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코뿔소 '노든'으로부터 출발하여 코뿔소 '앙가부', 펭귄 '치쿠'와 '윔보'를 경유하여 이름 없는 펭귄인 '나'에게 도착하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늙은 코뿔소와 어린 펭귄을 주인공으로 하는 버디무비이기도 하고요.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들이 이야기의 정서를 한 층 깊이 있게 꾸며 줍니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작가가 작품 속 인물들을 얼마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작가와 독자가 인물들을 향해 보내는 이 따뜻한 시선과 경청의 태도는 곧 작품의 주제의식으로 이어집니다. 인물들은 슬프고 절망적인 일들 앞에서 때로 분노하거나 무기력해지지만 그럼에도 다음 순간을 위해 지금 한 걸음 내딛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건 이야기 속에서 서로를 믿고 지지하면서 끊임없이 바라보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죠.


이야기의 서술자는 이름 없는 펭귄 '나'입니다. '나'가 처음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이야기의 절반이 지나간 시점이고요. 그 이전까지는 '나'가 노든에게 들은 것을 회상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의 서술자가 작품 속 등장인물로 명시되는 건 비교적 앞부분이고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그보다 한참 뒤라는 사실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을 영화처럼 보이게 해 준다는 점에서 꽤나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즉 이 이야기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거의 완벽하게 로드무비의 작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죠.


노든은 훌륭한 코뿔소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22쪽)
하늘의 별을 바라보느라 노든은 알이 살짝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조금씩 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부리가 껍질을 깨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내가 태어났다. (76쪽)


코끼리 고아원에서 코끼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코뿔소 노든은 처음에 자연히 코끼리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다 남과 다른 자기 모습에 의문을 가지며 바깥세상을 궁금해하기 시작하죠. 마침 사람들은 노든을 초원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노든은 코끼리들의 응원을 받으며 고아원을 떠납니다. 노든은 그곳에서 다른 코뿔소를 만나 가족을 꾸리고 행복하게 지내지만 곧 뿔 사냥꾼들의 습격을 받아 아내와 딸을 잃게 됩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노든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은 후 동물원에 가게 되죠. 노든은 이 동물원에서 앙가부를 만납니다.


앙가부는 분노와 실의에 사로잡힌 노든에게 다가와 바깥세상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합니다. 노든은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마음을 회복하며 앙가부와 함께 동물원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죠. 하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며칠 뒤 앙가부는 동물원에 숨어 들어온 뿔 사냥꾼에게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렇게 노든은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 세계에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나더니 노든의 눈앞에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출입문 쪽 철조망이 무너져 내리죠. 힘겹게 탈출하려 했던 노력이 허무할 만큼 쉽게 열린 길을 따라 우리 밖으로 나선 노든은, 동물들의 시체를 피해 걷다가 펭귄 치쿠를 만납니다. 치쿠는 또 다른 펭귄 윔보와 함께 돌아가며 버려진 펭귄 알을 품고 있었는데, 전쟁으로 윔보를 잃게 되자 알만 양동이에 담아가지고 나오다가 노든을 마주친 겁니다. 그렇게 둘은 또다시 길고 험난한 여정에 동행하며 긴긴밤을 함께 보내게 됩니다.  


알을 제 몸보다도 더 정성껏 돌보던 치쿠는 결국 '나'의 탄생을 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노든은 치쿠와의 약속을 따라 서툰 솜씨로 알을 보살피죠. 그렇게 '나'는 까만 밤하늘 아래 한 마리 코뿔소를 눈에 담으며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여정은 노든과 '나'의 바다를 향해가지요.


이야기는 '긴긴밤'이라는 제목에 맞게 밤의 이미지를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밤은 장면 전환을 위한 장치가 아니고 다음 날을 예비하기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인물들에게 밤은 그 자체로 관계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이면서, 위로와 연대가 더욱 굳건해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노든은 가족과 앙가부를 잃었고, 치쿠는 윔보를 잃었고, 다시 노든은 치쿠를 떠나보냈고, '나' 또한 여정의 막바지에서 노든과 작별인사를 한 뒤 자신만의 바다를 찾아가죠.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긴긴밤의 연대 안에서 하나의 범주, 즉 '우리'로 묶이게 됩니다. 심지어 한 번도 서로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이라고 해도 그렇죠. 그들이 만났다가 헤어진 수많은 밤들 속에 모든 관계의 기억이 인장처럼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긴긴밤』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바로 악역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야기 속 동물들이 겪는 불행은 모두 외부 세계의 인간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여기서 인간은 악역이라기보다는 삶의 기본적 조건으로 전제된 배경에 가깝습니다. 그마저도 전혀 예고되지 않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형태로 틈입하죠. 이야기는 그런 절망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위로 삼아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내는 인물들의 모습을 거듭 보여줍니다. 많은 독자가 이 작품에 감정적으로 깊게 이입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런 뭉클한 장면들에서 찾아볼 수 있겠죠.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니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