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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Dec 22. 2020

등록되지 않는 인생에 대하여

이란주, 『로지나 노, 지나』, 우리학교, 2020

SF작가이자 영화평론가인 듀나는 2009년에 한 연예인을 둘러싼 논란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이 그 자리에 설 가능성이 없는 이슈에 대해 잔인해진다. 악플러들 대부분은 연예인이 될 가능성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소동에 빠질 가능성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란주의 르포소설 『로지나 노, 지나』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보게 된다. 절대로 그 자리에 설 가능성이 없는 이슈에 극단적으로 잔인해지는 사람들. 우리는 이 소설에서 미등록 이주민을 바라보는 평범하고 폭력적인 한국인의 자화상을 마주한다. 과연 우리는 그런 사람들 틈에서 얼마나 제정신을 유지한 채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바로 내가 그런 잔인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주인공 로지나는 5살에 엄마 메디나를 따라 한국에 왔다. 그때 브로커에게 들인 돈이 8000달러나 됐다. 아빠 사이풀은 그보다 몇 년 전에, 지금은 폐지된 외국인산업기술연수생 제도를 통해 먼저 한국에 왔다. 사이풀 역시 브로커에 선을 댔었고, 그때 들인 돈도 아직 다 갚지 못한 채였다. 동생 라주는 로지나가 9살 때 한국에서 태어났다. 가족 모두가 미등록 이주민이었기 때문에 라주는 출생신고조차 할 수 없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등록'이다. 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모두, 분명히 존재하지만 '등록되지 않은' 누군가의 삶에서 기인한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 정부에 의해 국민으로 등록된 대부분의 한국인은, ―수십수백 겹의 불행이 우연히 겹쳐 외국에서 미등록 장기체류를 하게 되지 않는 이상― '절대로 그 자리에 설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다. 등록되지 못한 이들에 대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으면서, 그 대가로 거의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을 권리를 지닌 사람들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을 등록하거나 등록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와 관련하여 평론가 진중권은 그의 저서 『폭력과 상스러움』에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외국에 나가기 전만 해도 주민등록증은 '국민'이면 누구나 갖고 다녀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또 그 '증'을 얻기 위해 파출소에서 지문을 찍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일본에서 재일동포들이 지문날인을 민족 차별이라 반대한다는 게 매우 이상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 국가의 간섭은 보이지 않는다. 국가는 투명인간이다.

진중권, 「시민 길들이기」, 『폭력과 상스러움』, 푸른숲, 2002, 227쪽


외국인인 아내 역시 국가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한단다. 도대체 '내가 내 아내와 살겠다는데 도대체 국가가 왜 건방지게 자기한테 허락을 받으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신고 안 하고 버텼다.

같은 책, 228쪽


진중권은 국가를 투명인간이라 했지만, 로지나 가족에게 국가는 그들의 삶을 통째로 쥐고 흔드는 신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겨우 '등록'이라는 납작한 버튼 하나로. 진중권은 여권 등 다른 수단으로 신분을 증명할 수 있기에 등록을 거부하고도 일상을 이어갈 수 있었겠지만, 로지나 가족에게 등록은 먹고사는 문제로 직결된다. 누구는 거부하는 데도 재차 등록 신청을 요구받고, 누구는 절박하게 원해도 등록 자체가 거부된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대답은 허탈하게도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법과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한국인이 그렇게 대답했다. 원래 그런 거다. 당신들도 다 알고 온 거 아니었냐. 그렇게 못마땅하면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라. 그리고 국가는 그런 강고한 목소리들에 힘입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소홀히 했다. 그 해야 할 일이란 바로, 모든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노를 잃어버린 작은 배가 하염없이 바다 위를 떠돌듯 우리 가족은 목적지도 희망도 없이 그저 물 위를 떠돌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잔뿌리조차 내리지 않았다. (95쪽)
한국은 우리 같은 외국인을 종이컵처럼 생각하는 거야. 실컷 부려 먹고 구겨서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121쪽)
나는 아무리 어려워도 대학에 꼭 갈 작정이었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철도 없지, 한국 애들이랑 내가 똑같은 줄 알았다. (189쪽)
"못 하는 일 앞으로도 쌔고 쌨어. 그렇게 하나하나 상처받으면 너 못 살아." (242쪽)
산다는 것이 정말 이렇게 비루하고 헛된 제자리걸음이란 말인가? (262쪽)


1994년부터 13년간 운영되었던 '외국인산업기술연수제도'와 2003년부터 17년간 운영되고 있는 '외국인근로자고용허가제'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국가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한국은 이 제도로 실질적 피해를 입고 있는 미등록 이주민의 인권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악조건 속에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등록되지 않은 삶을 이어간다. 주인공 로지나 가족의 삶에도 이미 한국의 온갖 부조리가 압축적으로 배어 있지만, 현실에는 그보다 더 심각하고 비참한 사례도 흔하다. (물론 이 소설 또한 단단한 현실을 기반으로 쓰인 르포르타주다. 실화에 기반한 비극적 사례가 종종 등장하며, 작가가 필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을 주인공 가족에게조차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일어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주변 몇 사람들과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어보라. 우리나라가 고강도 인종차별 국가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2020년이고, 한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국가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이런 일이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현실을 방치해선 안 된다. 명백히 나쁜 일들에 대해 법적,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나라가 나쁜 것이고, 그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면 그 나쁜 일들의 책임 또한 국민에게 있는 것이다. 한국이 지금보다 좋은 나라가 되려면 미등록 이주민을 포함한 모든 소수자의 목소리에 함께 귀 기울이고 보편 인권을 향한 윤리와 규범쌓아 올리기 위해 보다 지하게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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