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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Dec 31. 2020

'서정적 아포칼립스'의 세계와 우주

조지 클루니, <미드나이트 스카이>, 2020

* 스포일러 : 강함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의 원작은 릴리 브룩스 돌턴Lily Brooks Dalton의 소설 『굿모닝 미드나이트』로, 파국을 맞은 지구의 척박한 풍경을 아름답고 섬세한 문장으로 녹여냈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서정적 아포칼립스'쯤 되는 셈인데, 이 역설적인 단어들의 조합에서 오는 이물감이 영화에도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영화 속 세계관에서 지구는 더 이상 초록별이 아니고 우주 또한 불가지의 신비로운 영역이 아닌데, 그럼에도 이 영화는 어떤 우주적 낭만과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2049년, 북극의 바르보 천문대에 홀로 남겨진 줄 알았던 어거스틴(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은 기지 안에서 한 소녀를 발견한다. 다른 연구원들은 곧 북극권까지 밀려올 파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두 기지를 떠났다. 소녀를 구조하러 올 사람은 없고, 어거스틴에게도 아이를 보살필 여력 따위는 없다. 그는 죽음을 앞둔 말기암 환자이다. 그가 바르보 천문대에 혼자 남기를 고집한 것은 남은 삶과 맞바꾸어서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없는 시간이 고요히 흐르는 동안에도 죽음은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온다. 어거스틴의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망자의 신 아누비스는 말없이 그의 생을 재촉한다.



같은 시각 우주 비행사 설리(펠리시티 존스Felicity Jones)는 우주선 에테르 호에서 지구와 교신을 시도하고 있다. 에테르 호는 목성의 위성 'K-23'에서 2년 동안 생명체의 존재 및 확장 가능성을 확인하는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 중이다. 하지만 3주 전부터 지구 상 어떤 국가와도 교신이 닿지 않는다. 이 3주는 지구에서 '그 사건The Event'이 일어난 시점으로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과 일치한다. 짐작했겠지만 <미드나이트 스카이>는 멀리 떨어져 있는 어거스틴과 설리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받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어거스틴은 에테르 호에 지구의 파국을 알려 귀환을 막기 위해 천문대에 홀로 남았다.


영화에서 '그 사건'은 원인 불명의 재앙으로만 암시될 뿐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재난인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온 지구를 황폐화한 중대 사건이 분명함에도 영화가 취하는 특유의 스탠스에 힘입어 차라리 신의 형벌에 가깝게 묘사되는 것이다.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나 테라포밍을 소재로 하는 sf에서 사건을 연결하는 인과의 첫 번째 고리로 흔히 내세우는, 재앙을 불러온 원인에 대한 설명이 이 영화에서는 의도적으로 누락되어 있다. 관객들은 그저 인간의 탐욕과 오만, 대자연의 분노와 같은 추상적이고 정형화된 이미지만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녹록지 않은 상황에도 어거스틴과 설리는 서로를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어거스틴은 교신에 필요한 더 강한 안테나를 찾아 하젠 호수 옆 기상관측소로 혹한의 길을 나서고, 설리는 고장 난 통신 설비를 수리하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우주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이제부터 영화는 두 인물의 동선을 본격적으로 대조하여 보여준다. 어거스틴은 지구에서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공간을 떠나 온갖 고난을 겪어가며 북극의 설원을 헤맨다. 그리고 설리는 아주 작은 돌발상황으로도 생사가 갈릴 수 있는 날것의 우주로 기꺼이 몸을 던진다. 영화는 설원과 우주의 흉포함을 인상적인 흑백의 대조와 함께 긴 호흡으로 교차편집하여 보여준다. 관객은 이토록 서정적인 세계관에서조차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세계를 일별한다. 결국 어거스틴과 설리는 각자 모종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가까스로 교신을 위한 지점에 도달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시종 생명력을 강조한다. 절망적 상황에 처한 인물들로 하여금 끝까지 분투하게 만드는 동력 다름 아닌 '생명'이다. 설리의 뱃속에는 곧 태어날 아기가 있고 어거스틴에겐 바르보 천문대에서 발견한 이후 계속 곁을 지킨 소녀가 있다. 어거스틴과 설리가 결연한 각오로 각자의 모험에 나설 수 있었던 건 다음 세대가 살아갈 우주 어느 한 자락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희망이, 지구의 소멸을 딛고 다시금 우주로 도약하게 하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 '서정적 아포칼립스'라는 역설은 이렇게 또 다른 희망 위에서 극적으로 완성된다.





바르보 천문대에서 발견된 소녀의 이름은 아이리스다. 이 아이와 관련하여 너무나 당연하고 처음부터 짐작 가능한 사연이 이야기의 결론부에 언급된다. 적어도 이 영화가 지닌 구도에서, 다음 세대를 이어갈 생명을 상징하는 아이리스가 소멸을 앞둔 지구에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



여러모로 영화 <그래비티>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배우도 그렇지만, 특히 설리가 동료들과 우주선 밖으로 나가는 장면 이후로 찾아오는 기시감은 일부러 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 정작 감독 본인은 크게 개의치 않은 듯하다. 하긴, 둘을 유사한 영화로 묶기엔 주제와 플롯에서 뚜렷한 차이 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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