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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09. 2021

진짜로 살아간다는 것

손원평, 『아몬드』, 창비, 2017

주인공 '선윤재'는 선천적으로 알렉시티미아, 즉 감정 표현 불능증을 가지고 있다. 편도체의 크기가 작아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윤재에게 엄마는 아몬드를 처방했다. 아몬드를 많이 먹으면 아몬드처럼 생긴 편도체도 언젠가 커질 거라는 희망이었다. 처방의 효과는 지지부진했고, 엄마는 다른 방안을 병행하기로 한다. 단기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증세라면 중장기적 대처가 필요한 법. 윤재는 엄마와 할머니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상황에 따른 적절한 반응을 기계적으로 암기한다. 상대방이 웃으면 같이 미소를 지어야 한다거나, 칭찬을 들었을 때는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규범들을.


윤재의 할머니는 엄마의 결혼을 반대했었다. 서울 소재 여대를 다니던 엄마가 학교 앞에서 좌판을 깔고 액세서리 장사를 하던 아빠를 만나 임신했을 때,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는 한 번 끊겼다. 하지만 윤재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엄마 혼자서 아이를 감당하던 칠 년의 세월이 지난 뒤 끊겼던 관계는 다시 이어졌다. 윤재의 삶에 할머니가 등장한 것이다. 윤재는 할머니를 '할멈'이라고 부른다.


윤재는 엄마와 할멈으로부터 여러 감정에 대해 배웠지만, 머리로만 이해할 뿐 직접 느끼는 게 아니다. 그래서였을까. 엄마와 할멈은 팍팍한 삶 속에서도 밀도 높은 감정들을 윤재 앞에서 거리낌 없이 표현한다. 그들은 울고, 웃고, 말하고, 욕하고, 화내고, 싸우고, 노래하고, 놀이를 한다. 그 모든 게 의식적 노력의 산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윤재가 남들처럼만 평범했으면 좋겠다고 내내 생각했지만, 사실 세 식구가 함께 하는 시간은 더없이 평범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엄마와 할멈이 드러낸 감정들은 윤재를 위한 연출이 아니라 오롯이 '진짜'였다는 뜻이다. 느끼지 못도 윤재는 항상 세 식구가 교류하는 감정의 중심에 있었다.


어딘가를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171-172쪽)


끔찍한 사건은 평온한 일상을 배경으로 일어난다. 크리스마스이브, 철에 안 맞게 냉면을 먹고 나와 환하게 웃던 엄마와 할멈은 칼과 망치를 휘두르는 남자의 표적이 되었다. 세상을 비관하던 남자는 그날 거리에서 웃고 있는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기로 결심했다. 할멈은 죽었고 엄마는 살아남았지만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갔다. 눈앞에서 참상을 목격한 윤재는, 그러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이고, 이야기는 4부로 구성되어 있다. 2부에는 '곤이'가 등장하고, 3부에는 '도라'가 등장한다. 곤이의 본명은 '윤이수'인데, 어릴 때 실종되었다가 십삼 년 만에 소재가 파악되어 가족에게 돌아왔다. 병원에 입원해있던 이수의 엄마는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과 재회하고 며칠 뒤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날 아들이라 믿었던 아이는 실은 이수가 아니라 윤재였다. 이수의 아빠는 죽어가는 아내에게 반듯하게 자라서 돌아온 아들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런 그의 눈에 보호 시설과 소년원을 들락거리며 지냈던 이수는 완전히 격이었다. 대역이 필요했다. 결국 윤재가 그 역할을 맡아 오래전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아들인 척 연기를 했다.


그 일로 윤재는 곤이의 표적이 되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지만, 두려움을 못 느끼는 윤재는 곤이가 원하는 쾌감을 줄 수도 없다. 바위를 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에 곤이가 지쳐갈 무렵, 둘은 자석처럼 서로에게 이끌려 호기심 어린 대화를 나눈다. 알고 보니 둘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타인으로부터 이해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두 아이가 서서히 거리를 좁혀가며 몰랐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애틋하고 애달프다. 이 아이들에게 세상이 조금만 덜 가혹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공식적으로, 그러니까 아이들의 분류에 따르면 우리는 '적'이었다. 그동안 벌어진 일들만 보더라도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래서, 누가 그러자고 정한 것도 아닌데 학교에서 곤이와 나는 서로 모른 척했다. 말을 섞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우리는 칠판지우개나 분필처럼 그저 학교를 구성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거기서는 누구도 진짜가 아니었다. (139쪽)


3부의 도라는 윤재와 곤이 사이 회색지대에 놓인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세 아이가 만들어내는 삼각형의 한 점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세계관의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바깥쪽으로 달려 나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도라는 윤재의 마음속에 감정의 씨앗이 자랄 공간을 만들어준 소중한 친구다. 윤재는 처음 겪는 두근거림 앞에서 서툴게 어쩔 줄 몰라하고, 가장 친한 곤이에게마저 도라와의 관계를 숨기면서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사춘기에 자연스럽게 찾아드는 설렘일 뿐인데도, 이 대목에서 윤재는 어딘가 고장 난 듯 어색하다. 하지만 진한 감정의 울림 앞에서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마지막 4부는 아이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던 윤재와, 자주 불붙는 감정을 도무지 삭일 수 없어 떠나버린 곤이의 관계는 막바지의 비극적 사건으로 다시 한번 전환점을 맞는다. 그리고 각자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온다. 공감 능력 없는 괴물로만 여겨지던 윤재는 결정적 순간에 곤이를 위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진다. 세상을 저주하며 한껏 위악을 부리던 곤이는 위협적인 공간에서 필사적으로 윤재를 밀어내며 자기가 진정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공감 능력, 정서적 안정, 세상과의 조화와 같은 피상적 조건의 충족보다 중요한 건 '내 눈 앞에 놓인 삶에 대한 진정성'이었다. 윤재, 곤이, 도라는 언제나 자기 삶에 진지하게 응했고 아마 그래서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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