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May 25. 2021

페미니즘 교육의 당위에 관하여

오렐리아 블랑,『나의 아들은 페미니스트로 자랄 것이다』,브레드, 2021

단호하면서도 강렬한 제목이 눈에 띄는 페미니즘 교양서 『나의 아들은 페미니스트로 자랄 것이다』를 보았다. 오렐리아 블랑은 기존 페미니즘에 관한 논의를 한 단계 진전시키고 있는 최근의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그 흐름이란 바로 페미니즘 '교육'이다. 페미니즘은 그동안 성폭력, 성평등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여 사회적으로 발전적인 의제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 하지만 교육에서는 어떨까.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페미니즘을 배우며 자라고 있을까. 만약 이 질문이 불필요하거나 과격하게 느껴진다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정서―또는 두려움이나 공포―는 무엇일까. 세계 주요 대학에서 여성학이 전공 학문으로 편성되어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어린아이, 특히 아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1세기 아동인권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면서 우리는 어른의 신념을 아동에게 불어넣는 일에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에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자식에게 페미니즘을 교육하는 것, 나아가 아들을 페미니스트로 기르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은 일인가? 그것이 강압이나 강요, 일방적인 사상 주입으로부터 충분히 안전하다는 근거는 확보되었는가?'


저자에게 이 질문은 '자식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 나아가 아들을 민주주의자로 기르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은 일인가?'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질문이다. 현대 시민의 교양으로서 페미니즘은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의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에게 미심쩍은 눈빛을 하고서 "너 혹시 민주주의자야?"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민주주의자로 기르겠다는 부모에 대해서도 사상 검증의 잣대를 들이거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는다. 현시점에서 그것은 당위 명제이며, 당위를 검문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비윤리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아들을 페미니스트로 기르겠다는 부모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놀랍게도 어떤 반응도 보일 필요가 없다. 페미니즘에 관한 해묵은 오해 중 하나는 '이 불온한 사상'이 편을 가르고 벽을 세워 소모적 갈등을 부추긴다는 것인데, 이런 관점을 고수하는 자들이 보기에 페미니즘 교육은 그야말로 사회의 근간을 해칠 우려가 있는 위험천만한 발상일 것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아주 놀랍게도, 사실 페미니즘이 사회의 갈등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폐된 환부를 드러내어 진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면 어떨까.


알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러셀의 찻주전자만큼이나 터무니없게 여겨질 것이라는 점을. 따라서 그들의 진지한 관심사 리스트에 결코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맹목적인 다수의 거친 아우성도 시대의 조류를 막지는 못한다. 페미니즘은 점점 더 강한 동력으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민주주의가 세계 시민 사회에 뿌리내린 것과 정확히 같은 경로로 전 세계에 단단히 자리매김할 것이며,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둔한 인식보다 빠르게 일상 속으로 먼저 스며들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예리한 시선으로 페미니즘을 선도했던 극소수 선구자들을 제외하면, 지금과 같은 페미니즘의 도래를 우리 중 누가 예상이나 했는가.


여성이 목소리를 낸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다만 이제야 세상이 여성의 말을 귀담아듣기 시작했을 뿐이다. (……)  우리는 성폭력 가해자가 그늘 속에 숨어 사는 괴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들은 평소 우리의 동료고 친구이자 형제, 심지어 아들일 수도 있다. 그렇다. 우리 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46쪽


페미니즘은 혐오를 동력으로 삼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적대하는 이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페미니스트가 진정으로 마음 쏟는 일은 그동안 숨 쉬듯 벌어졌던 크고 작은 차별과 폭력, 혐오를 남김없이 폭로하고 폐기하는 것이다. 명백히 사회의 밑바탕에 깔려 있던 여성 혐오에 이름을 붙이고, 재정의하고, 혐오의 피해자에게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돌려주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구성원 모두의 복리를 증진하는 일이다. 이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을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아들을 페미니스트로 기르겠다는 부모에 대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이제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어떤 반응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단한 용기를 냈다며 찬사를 보내든, 아이를 망치려고 작정했느냐며 비난하든, 내게는 비슷하게 구시대적으로 느껴진다. 이미 세계는 이렇게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2017년 <엘르Elle> 12월호에 '남자아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가해자돼지로키우지않으려면'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보다 몇 주 전 <허핑턴 포스트The Huffington Post>는 '여자아이에게 스스로 보호하는 법을 가르치기에 앞서 남자아이에게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자'라는 취지의 기사를 내보냈다. 2018년 3월 <뉴욕 매거진New York Magazine>은 두 가지 질문을 담아 '남자아이는 어떻게 키워야 하나?'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스위스 일간지 <르 탕Le Temps>은 '아들아, 너는 페미니스트가 될 것이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짧은 시간에 남자아이 교육이 진지한 논의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Justin Trudeau까지도 '나는 왜 아이들을 페미니스트로 키우는가?'라는 짧은 글을 기고했다.
46쪽


오렐리아 블랑은 이 책에서, 아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칠 때 부모가 현실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고민을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동안 남아와 여아의 선천적 차이로 여겨졌던 특징들이 실제론 사회적 기대나 정교한 마케팅의 결과로 형성되었다는 점과, 그것이 다시 성차별의 동력으로 작용하기까지의 과정을 사례를 바탕으로 풀어 설명한다. 남아와 여아에게 별도로 어울리는 감정이나 행동 패턴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면서 아이의 자연스러운 표현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것을 강조한다. 성별에 따라 더 잘하고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고정관념으로 아이의 잠재력을 위축시키지 말 것을 요구한다. 페미니스트 부부조차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성역할에 관한 편견과 아이러니를 다루는 방법을 소개한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혐오와 맞닥뜨려야 하는 길이라 진통이 따르겠지만, 그 진통은 페미니즘의 감소세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같은 시대적 가치의 정착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비용이다.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앞서서 실천하는 이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오늘보다 건강할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진짜로 살아간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