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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y 31. 2021

미완의 판타지

송은혜, 『퍼플캣』, 문학과지성사, 2020

『퍼플캣』의 이야기는 고양이 '레옹'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레옹은 횡단보도 중간에서 벗겨진 아이의 슬리퍼를 입으로 주워서 가져다 주려다 그만 자동차에 깔리고 만다. 주변의 다른 아이들은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모여들고, 차를 몰던 어른은 고양이의 죽음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이야기는 처참한 죽음을 길게 묘사하지 않는다. 레옹에게는 죽음 이후의 시간이 활짝 열려 있고, 본격적인 모험은 이제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중심인물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사후의 모험을 다루는 설정에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 떠오른다. 현실에서의 죽음이 표상하는 문제의식이 사후 세계의 목적론에 가닿는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닮아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서 병약한 소년 칼에게 '네가 죽으면 하얀 새가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던 형 요나탄은 불난 집에서 동생을 구해 내고 먼저 세상을 떠난다. 뒤이어 병으로 숨진 칼은 사후세계 낭기열라에서 다시 요나탄을 만나 모험을 시작한다. 낭기열라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한편으로 독재자 텡일과 괴물 카틀라가 사람들을 잔인하게 억압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형제는 용감하게 악에 맞서고 끝내 승리한다.


『퍼플캣』에서 곤경에 빠진 아이를 도우려다 죽은 고양이 레옹도 곧바로 사후의 모험을 시작한다. 죽은 고양이들은 고양이 상조 회사 직원에게 하루 이용권을 받아 24시간을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다. 처음에 레옹은 다른 고양이들을 따라 호화로운 고양이 온천으로 향하지만 곧 다시 현실로 돌아 나오기로 결심한다. 절친한 친구 '타루'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 사후 세계의 온갖 사치를 뒤로 한 채 다시금 힘겨웠던 현실을 택한 동기는 무엇일까. 이야기는 이렇게 비현실의 시공간 위에 현실의 모순을 포개어놓는다. 이렇게 차가운 세상에서도 한 가닥 건져 올릴 희망이 있을까.


김중미는 장편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에서 인간이 아닌 동물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기이한 현실의 윤곽을 인상적으로 그려낸 바 있다. 나는 『퍼플캣』이 판타지의 형식을 빌려 말하고자 하는 바도 결국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것은 동물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기이할 만큼 비정하게 느껴지는 세상과, 그럼에도 끝내 놓을 수 없는 따뜻한 희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자기 차에 뭔가가 부딪쳐도 차를 세우지 않아. 난 이 해안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는 동물들을 많이 봤어. 고라니, 너구리, 족제비, 뱀. 물론 가장 많이 죽는 게 고양이나 개지. 그런데 단 한 번도 자기가 친 동물이 괜찮은지 내려서 살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김중미,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낮은산, 2016, 132쪽


은주 너는 좋은 사람 같대. 자기는 앞으로도 사람하고 친해지지 않을 거지만 어부 아저씨들과 네 덕분에 괜찮은 사람도 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대.

같은 책, 164쪽


다만 이 이야기에는 아쉬운 점이 무척 많다. 이야기 속에는 독자의 흥미를 끄는 장치가 여럿 등장한다. '㈜고양이 상조 회사, 하루 이용권, 고양이 리무진과 날개 달린 셔틀버스, 네 가지 탕이 있는 고양이 온천, 고양이 혼령 감별사, 고양이 복지사, 시간 많은 시간 은행, 흑묘단, 퍼플캣 현상, 레인보우 랜드'와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대부분 일회성 에피소드처럼 잠시 나왔다 사라질 뿐 소재와 소품으로서 충분한 매력을 뽐내지는 못한다. 예컨대 이야기 초반에 언급되는 고양이 온천의 뿅탕, 솜사탕, 후루룩탕, 우당탕탕 등 4개 탕의 기능과 관련해서는, 이후에 레옹이 솜사탕에 들어가 타루를 회상하는 것 외에는 어떤 사건도 개연성 있게 일어나지 않는다. 고양이 상조 회사와 고양이 혼령 감별사는 기계적으로 나타나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한 뒤 퇴장하고, 흑묘단은 악명을 떨치는 조직이라기엔 임팩트가 너무 빈약하다. 고양이 복지사 '반달' 캐릭터나 시간 많은 시간 은행은 그 개성과 역할이 미처 다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사용된 느낌이 있고, 고양이 자치 위원회가 공문을 보낸다는 설정은 이야기를 통틀어 단 한 번 언급되는데 왜 이런 설정이 필요한지조차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요소는 자칫 이야기를 산만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밤이면 아파트 관리 사무소 뒤편에 집결하는 고양이 자치 위원회에서도 타루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동안 길고양이를 업신여기고, 모욕을 준 행위를 공식 사과하라고 공문을 보내 왔다. (37쪽)


교통경찰과 레옹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의문스럽긴 마찬가지다. 이 교통경찰은 어떻게 죽은 고양이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된 걸까. 에필로그에서 얻은 힌트를 가지고 짐작해보면 결국 '착하고 순진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는 다분히 무성의한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런 무심한 태도는 복선의 가시화 작업에서도 드러난다. 고양이 온천 매표소의 할머니는 알고 보니 흑묘단의 일원이었는데, 앞서 이를 암시하는 복선이 언급되지만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렇게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결점들도 쌓이고 쌓이면 작품 전체의 뼈대를 흔들게 된다. 『퍼플캣』 역시 그런 작품이어서, 어쩔 수 없이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판타지 소설의 열화 버전으로 보이게 된 점은 무척 아쉽게 느껴진다.


모든 이야기가 개연성을 기반으로 펼쳐져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과 같은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쓰였음에도 개연성에 얽매인 흔적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대신 특유의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감각이 장르적 매력을 더하는 요소로 기능했다. 다만 『퍼플캣』은 그런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 개연성의 공백보다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소품들이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쓰인 데다 소재 간 연계가 자주 끊어져 마치 미완의 판타지로 읽힌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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