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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l 27. 2021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욕망

봉준호, <기생충>, 2019


201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2019)을 다시 보았다. 당시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다양한 해석과 평론이 있어왔고 그만큼 대중에게 폭넓게 알려지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담론을 의식적으로 빼놓고 글을 쓰기는 어려워 보인다.


나는 이 작품이 한 해에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를 모두 석권할 수 있었던 요인을 판단할 만큼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이 영화가 은유나 상징적 장치를 빠짐없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장르적 쾌감을 얻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이고, 그러면서도 세계를 가로지를 만큼 중요한 시대정신을 성공적으로 포착해낸 작품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짐작할 따름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 테마가 바로 ‘계층’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도입부부터 가파르게 분화된 계층의 면면을 극단적으로 대조하여 전시한다. 이 작품이 특히 탁월한 지점은 그것을 단순히 시각적으로만 펼쳐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영화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계층 간의 경계선을 긋는다. ‘연교(조여정)’와 ‘기택(송강호)’은 사는 집, 사용하는 언어, 입는 것과 먹는 것, 그리고 풍기는 냄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생물종에 속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영화가 묘사하는 대로라면, 현대 사회에서 계층은 한 인간이 갖는 정체성의 가장 본질적인 영역까지 파고든다.


물론 연교가 고상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기택 또한 비루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인물이 표상하는 계층의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우리는 그들 사이에 의미 있는 차이점이 거의 ―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이 실제로 영위하는 삶들 사이에는 정의롭고 공정한 방식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진입장벽이 존재하는데, 영화는 후반부에 들어 이 부조리에 모든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 시선은 당연히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의 욕망에 포개어지는 지점이 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모멸감을 느낀 기택이 ‘동익(이선균)’을 칼로 찌르는 사건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이 세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욕망과 대립이 더 이상 특정 국가만의 고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작품이 현실을 일대일로 반영하고 있지는 않지만,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이 거센 욕망은 관객들이 슬쩍 보고 넘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물들의 욕망에서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욕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지점은, ‘기우(최우식)’에게 계획이 있었던 전반부와 계획이 없는 후반부 사이에 거의 장르가 바뀌는 수준의 서사 전환이 일어난다는 데에 있다. 전반부의 이야기는 적어도 영화 속 인물들 간에는 체계적으로 전개되는 듯 보이지만,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곧장 정돈되지 않은 난장판으로 빨려 들어간다. 영화의 진가는 장르적 색채가 강하게 묻어나는 후반부에 있는데, 그것을 만들어내는 동력은 영화의 시작부터 서서히 응축된 긴장감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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