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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Nov 27. 2021

꿈처럼 반짝이던 내 유년의 정원

필리파 피어스,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창작과비평사, 1993

* 쪽수: 280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Tom 's Midnight Garden』는 많은 작가가 자신의 인생 동화로 꼽는 필리파 피어스Philippa Pearce의 걸작 판타지입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나온, 시공간의 순환이나 타임 패러독스를 소재로 하는 동화라면 모두 알게 모르게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어떤 장르적 원형을 보여주는 이야기지요. 필리파 피어스의 작품은 아주 여린 동심에만 찾아드는 찰나의 감정들을 그야말로 황홀하게 포착해내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독자는 이야기 속 '톰'과 '해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순도 높은 유년의 감정들을 생생하게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조금은 외롭고 쓸쓸한 일입니다. 동화 작가 케이트 디카밀로가 2018년에 쓴 유명한 글, '왜 동화는 약간 슬퍼야 하는가'를 생각나게 하지요.


'Why Children’s Books Should Be a Little Sad – Kate DiCamillo'


술술 읽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21세기 한국의 어린이 독자에겐 더 그렇겠죠. 빅토리아 시대와 20세기 중반의 영국을 비교하며 상상해볼 만한 사전 정보가 없다면 이 이야기가 묘사하는 뉘앙스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내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요. 때문에 이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길벗어린이 출판사에서 2019년에 번역 출간한 그래픽 노블로 시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출처] 길벗어린이 홈페이지


톰은 동생 피터가 홍역에 걸리자 여름 방학 동안 케슬포드의 이모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너무 낡아 종이 울리는 횟수가 맞지 않는 괘종시계를 발견하지요. 괘종시계의 주인은 이 집의 주인이기도 한 바돌로매 할머니입니다. 이모와 이모부는 그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고요. 첫날밤 위층의 방에서 잠들기 전 톰은 열두 번까지만 울릴 수 있는 괘종시계가 열세 번 울리는 소리를 듣고는 호기심에 아래층으로 내려가 빛이 새어 들어오는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갑니다. 정원은 매일 밤 열세 번째 시간에 톰에게만 열리는 비밀스러운 공간입니다. 이제 톰의 세계는 현실과 정원으로 나뉘게 되지요.


처음에 정원의 존재를 알고 당황했던 톰은 차츰 이곳에서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아갑니다. 간밤에 그림 같은 정원으로 통했던 뒷문은 다음 날 아침에 열어보면 갑갑한 현대식 주택가 풍경으로 바뀌어 있죠. 게다가 정원의 시간은 톰이 살아왔던 현실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는 듯 보입니다. 밤낮이 뒤바뀌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 만에 계절이 변하거나 시간의 흐름까지 뒤죽박죽이 되기도 합니다. 정원에 다녀갈 때마다 톰은 점점 더 강한 호기심에 이끌리게 되지요.


톰은 이 신비로운 정원에서 해티라는 소녀를 만나 친구가 됩니다. 해티는 자신을 공주라고 소개하지만 실제론 고약한 숙모네 집에 얹혀살며 외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역시 제 의지와 관계없이 이모네 집에 오게 된 톰이 해티와 친구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숙모에겐 아들 셋이 있는데 해티가 마음 놓고 어울릴 수 있는 상대는 아닙니다. 해티가 이 집에서 그나마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은 정원사인 아벨 아저씨뿐이에요. 그리고 이 정원에서 톰의 존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도 해티와 아벨 아저씨뿐입니다. 어쨌거나 톰은 정원에선 정체불명의 이방인이니까요.


한편 톰은 정원에서 발견한 몇 가지 단서를 토대로, 자신이 정원에 올 때마다 빅토리아 시대의 어느 시점으로 시간을 거슬러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톰의 현실은 20세기 중반일 테니, 두 세계 사이엔 최소한 반세기 정도의 시차가 존재하는 것이죠. 그리고 정원의 중심에는 언제나 해티가 있습니다. 대체 톰과 해티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이야기의 후반부로 가면 어느덧 정원 속 해티는 눈에 띄게 성장해 있고, 톰은 곧 부모님과 피터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집에 가기 전날 밤, 톰은 정원에서 아주 오랫동안 머물 계획을 세웁니다. 정원에서 아무리 긴 시간을 보내도 현실에선 고작 몇 분밖에 흐르지 않으니, 떠나기 전에 실컷 놀다 올 생각인 것이죠.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마지막 밤에 정원은 열리지 않습니다. 톰은 울면서 해티에게 도와달라 소리쳐보지만, 놀라 달려온 사람은 해티가 아니라 톰의 이모부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슬픔과 실망에 잠긴 톰에게 마법처럼 근사한 결말이 다가오지요.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는 어린이에게 친절하지 않은 어른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시기에 쓰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는 어린이에 대한 인식 자체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더욱 먼 과거의 풍경을 겹쳐서 보여주고 있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 곳곳에 배치된 요소들이 보다 선명하게 빛날 수 있습니다. 톰과 해티의 유년은 슬프고 사랑스럽습니다. 우리가 이 책을 읽을 때 분명히 느끼게 되는 것은 어린이라는 세계가 이렇게나 다채로운 색깔로 빛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 역시 이토록 찬란한 정원에 대한 동경을 언제나 가슴 안에 품고 살아왔다는 사실일 겁니다. 나만의 비밀 정원과 그곳에서 만난 놀이 친구, 저마다 한 움큼씩 짊어지고 있는 외로움, 서로를 향한 오해와 이해, 시간 이동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관계의 순환, 어른의 힘을 빌리지 않는 어린이의 모험, 그리고 그 모든 꿈같은 여정에 동행하는 감정의 밀도까지,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동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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