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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Dec 10. 2021

당신을 집어삼킬 구덩이

루이스 쌔커, 『구덩이』, 창비, 2013

* 쪽수: 334



루이스 쌔커Louis Sachar의 『구덩이Holes』는 1999년 뉴베리 메달 수상작입니다. 뉴베리 메달은 칼데콧 메달과 함께 미국 최고의 아동문학상으로 꼽힙니다. 대상에 해당하는 뉴베리 메달과 우수상에 해당하는 뉴베리 아너 상으로 나뉘고요. 아동문학상이라고는 하지만 최근 수상작들의 면면을 보면 동화부터 청소년 소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아우르고 있습니다. 『구덩이』 역시 영 어덜트 문학으로 분류되는 청소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요. 2003년에는 시고니 위버, 샤이아 라보프 주연의 동명 영화 <홀즈Holes>로도 개봉한 바 있습니다.


주제와 아이디어, 스토리텔링이 모두 묵직하고 내러티브도 촘촘하게 짜인 수작입니다. 이야기는 시작부터 아주 인상적이에요. 주인공 '스탠리 옐내츠Stanley Yelnats'의 이름은 팔린드롬입니다. 똑바로 읽든 거꾸로 읽든 같은 이름이 되지요. 여기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주인공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 인물들의 이름은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대부분의 인물이 본명 대신 닉네임으로 불리거든요. '제로Zero', '엑스레이X-Ray(엑스레이는 피그 라틴, 즉 말장난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지그재그ZigZag', '겨드랑이Armpit', '자석Magnet', '오징어Squid', '미스터 선생님Mr. Sir'과 같은 개성 넘치는 이름들은 이 작품의 매력을 한결 돋보이게 해주는 요소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못된 행동을 한 아이들은 '초록호수 캠프'에 가게 됩니다. 초록호수 캠프는 실제론 호수도 아니고 캠프도 아니에요. 황폐한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소년원이죠. 어느 방향으로 탈출해도 목이 말라 쓰러져 독수리 밥 신세가 되기 때문에 감시탑도, 철조망도 필요 없는 자연 감옥입니다. 스탠리는 유명한 야구선수 '클라이드 리빙스턴'이 어느 행사에 기증한 운동화를 훔친 혐의로 캠프에 끌려왔습니다. 캠프에 입소한 아이들은 매일 뙤약볕 아래에서 깊이와 폭이 1.5미터인 구덩이를 하나씩 파야 합니다. 못된 아이에게 고통스러운 벌을 주면 착한 아이가 되리라 믿는 사회의 풍경은, 이렇듯 말없이 무수한 구덩이로 강렬하게 가시화됩니다. 이야기 제목으로 쓰인 '구덩이'는 아이들을 계도와 교정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사회의 희비극적 단면을 폭로하는 장치입니다.


새로 온 스탠리는 상담 선생님 '펜댄스키'의 안내를 받아 같은 조에 있는 여섯 아이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아이들은 스탠리에게 금세 '원시인Caveman'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죠. 선생님은 스탠리에게 구덩이를 파다가 특이한 물건을 발견하면 보고하라고 지시합니다. 이제 스탠리는 꼼짝없이 열여덟 달 동안 구덩이를 파야 합니다.


이야기는 중간중간 먼 과거의 전설 같은 에피소드를 끼워 넣습니다. 100년도 더 전에, 라트비아에 살던 스탠리의 고조할아버지 '엘리아 옐내츠'는 마을의 한 소녀에게 청혼했다가 좌절하고는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청혼을 도와주었던 '마담 제로니'라는 집시 여인과의 약속을 어겨 가문 대대로 저주를 받게 되죠. 저주가 실제 효력이 있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집시 여인의 저주'라는 설정이 과거 플롯에 힘을 실어주는 장치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알고 보니 스탠리는 억울하게 캠프에 끌려왔는데, 정작 본인은 이런 불운이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체념한 것으로 보이거든요. 즉 마담 제로니의 저주는 과거와 현재의 플롯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끈으로 기능하는 것이죠. 작품의 결말은 이 끈으로 묶인 운명의 매듭이 자연스럽게 풀리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고조할아버지의 일화가 인물 간 관계의 시작과 끝을 암시하는 장치―자세한 내용은 중요한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됩니다―라면, '키스하는 케이트 바로우'라는 빌런의 일화는 이 작품의 배경이 어째서 초록호수 캠프여야 하는지를 부각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0년 전, 텍사스 초록호수 마을의 백인 교사 '캐서린 바로우'는 흑인 양파 장수 '샘'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샘은 인종차별주의자 '찰스 워커'의 총에 맞아 죽고, 캐서린 바로우는 악명 높은 무법자 '케이트 바로우'가 되었습니다. 이후 초록호수는 말라 사막이 되었고, 짐작대로 초록호수 캠프가 들어선 것이죠. 110년 뒤, 캠프의 총책임자인 '워커 소장'은 다름 아닌 살인자 찰스 워커의 손녀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야기가 꽤 복잡한 관계 구도를 기반으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복잡하게 전개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론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어쩌면 퍼즐을 맞추는 것보다 퍼즐이 저절로 맞춰지는 것 같은 느낌에 더 가깝겠네요. 주인공 스탠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현재의 사건들은 굉장히 가혹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데 비해, 과거 플롯은 부분적으로 과장되거나 포장된 전설처럼 묘사 점도 이 작품의 장르적 매력을 극대화하는 요소 중 하나지요. 우린 누구나 검증 불가능한 과거의 일들을 조금씩 과장하거나 각색하길 좋아하니까요. 앞에서 무심한 듯 던져졌던 장치들이 결말로 가면 빠짐없이 하나의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그만큼 허투루 쓰인 복선이 하나도 없게 느껴질 정도로 치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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