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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an 09. 2022

살아있다는 기적

엘윈 브룩스 화이트, 『샬롯의 거미줄』, 시공주니어, 1996

* 쪽수: 264



삶에는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작품 속 서사를 통해 더욱 명료해지는 단어가 많이 있습니다. 제게는 『샬롯의 거미줄Charlotte's Web』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무녀리runt'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보는 것만으로 연약한 것들에 대한 애틋함, 사랑스러움의 정서가 묻어나죠. 이 작품이 아니었다면 제가 무녀리란 말속에 이런 이미지들을 입체적으로 쌓아 올릴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전 이것 하나만으로도 『샬롯의 거미줄』이 찬사를 받아 마땅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여리고 약한 존재의 사랑스러움을 인상적으로 어필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얼개는 간단합니다. 무녀리로 태어난 돼지 '윌버'와 거미 '샬롯'의 우정이 이야기의 큰 줄기가 됩니다. 연약한 윌버는 몇 번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그때마다 주위 인물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헤쳐나갑니다. 그리고 끝에는 자기보다 더 작고 약한 존재를 위해 헌신하는 동물로 성장하지요. 윌버의 이러한 성장 과정은 많은 면에서 어린이의 삶과 닮아 있습니다.


작고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나자마자 인간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윌버를 처음 지켜준 인물은 '펀'이라는 소녀였습니다. 윌버는 펀과 함께 5주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낸 뒤 '주커만 삼촌'의 헛간으로 팔려가지요. 펀은 윌버를 보러 자주 삼촌의 헛간에 찾아오지만 더 이상 함께 살며 보살펴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윌버는 부모 같았던 펀을 떠나 헛간의 삶에 적응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 천방지축 같은 아기 돼지 윌버는 쉽사리 친구를 사귈 수 없죠. 다른 동물들의 쌀쌀한 반응에 실망한 윌버가 어둠 속에서 흐느껴 울 때 어디선가 작게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내가 네 친구가 되어 줄게."


보이지 않던 목소리의 정체는 거미 샬롯입니다. 처음에 윌버는 샬롯이 잔인하고 교활하기만 한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미줄에 걸린 다른 동물의 피를 빨아먹는 모습이 끔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내 모든 동물이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에 따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경험 바깥에 있던 친구를 새롭게 만나는 것만으로 윌버는 한 뼘 성장하게 되는 것이죠.


새로운 친구들과의 생활에 차츰 적응해나갈 때쯤 윌버는 늙은 양으로부터 자신이 크리스마스 즈음에 죽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새끼 돼지는 모두 햄과 베이컨이 되어 사람들의 식탁에 오를 운명이라는 겁니다. 겁에 질린 윌버는 소리를 지르며 날뛰고, 샬롯은 그런 윌버를 진정시키며 도울 방법을 고민합니다. 그리고 이내 거미줄의 한복판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글자를 짜넣기 시작하지요.


날이 밝자 농장 일꾼 '러비'가 헛간에 찾아와 샬롯의 거미줄을 발견합니다. 거미줄 한가운데에는 '대단한 돼지SOME PIG'라는 글자가 짜여 있습니다. 소문은 삽시간에 번져 윌버는 하루아침에 스타 돼지가 됩니다. 주커만은 이 신비로운 현상을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윌버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로써 윌버는 죽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지요. 윌버는 이후에도 몇 차례 더 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시종 평범함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합니다. 남보다 특별히 뛰어나지 않아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은 '기적'이라는 말로 설명하지요. 윌버는 평범한 돼지입니다. 어쩌면 평범함에 조금 못 미치는 돼지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헛간 친구들의 눈에 윌버는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친구입니다. 샬롯이 거미줄에 글자를 짜 넣음으로써 인간의 눈에 기적으로 보이는 현상을 연출한 것은, 무녀리 윌버가 세상에 무사히 태어나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윌버 또한 샬롯이 거미줄에 짠 글자들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대단한 돼지, 근사한 돼지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친구가 그렇게 만들어준 덕분이었으니까요. 친구를 위한 대가 없는 헌신과 우정의 가치를 몸소 경험한 윌버는 이제 거꾸로 샬롯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합니다. 이야기의 결말부에 윌버는 지친 샬롯이 온 정성을 기울여 만든 알주머니를 대신 지켜주지요. 추운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봄날, 새끼 거미들이 태어나고 윌버는 기꺼이 그들의 친구가 되어줍니다. 『샬롯의 거미줄』에서 사랑과 우정은 이처럼 대가 없는 헌신을 매개로 끊임없이 대물림되어 흘러갑니다. 윌버의 성장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우리가 왜 주변의 모든 어린이에게 친절해야 하는지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윌버와 샬롯이 자기네 삶으로 훌륭하게 증명해낸 바, 어린이를 향한 대가 없는 친절은 곧 다음 세대 전체를 향해 보내는 사랑으로 번져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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