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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an 21. 2022

행복을 일구어내는 삶

데이비드 스몰, 사라 스튜어트, 『리디아의 정원』, 시공주니어, 1998

* 쪽수: 36



『리디아의 정원』은 20세기 미국 경제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어느 소녀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 편지글의 형식을 배울 때 짧게 소개되는 작품이기도 해서 익숙한 어린이 독자들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리디아의 정원』은 그렇게 도구적으로만 쓰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입니다. 이 안에선 글과 그림이 서로 아주 다른 뉘앙스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 둘을 결합했을 때에 비로소 작품 속 서사를 온전히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거든요. 실은 대다수의 그림책이 그렇죠.


『리디아의 정원』에서 글은 어린 리디아가 1935년 8월부터 1936년 7월까지 쓴 12통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림은 리디아가 구체적으로 겪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지요. 처음에 리디아는 할머니,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경제 위기로 리디아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가족들은 리디아를 짐 외삼촌에게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 결정 직후 리디아가 곧 만나게 될 짐 외삼촌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이 책의 첫 번째 글입니다. 리디아는 제가 처한 힘든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듯합니다.


외삼촌네로 떠난 리디아는 이제 고향집에 있는 식구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편지에는 리디아가 엄마, 아빠, 할머니께 얼마나 큰 감사와 사랑을 느끼고 있는지 고스란히 담겨있죠.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 경험하게 된 기쁘고 설레는 마음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글만 보면 리디아는 분명 행복한 소녀입니다.


그런데 그림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기차에 올랐던 순간부터 리디아가 느꼈을 막막함, 외로움, 불안, 슬픔, 두려움 같은 정서를 묘사하고 있죠. 기차에서 내려 역사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리디아는 높고 어두운 실내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때 리디아의 표정은 기쁨, 설렘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어 보이고요. 당연합니다. 쫓기듯 떠밀려온 낯선 공간에서 어떻게 기쁠 수 있겠어요.


이곳에 오기 전 리디아는 할머니와 함께 집 앞 널따란 정원에 온갖 식물을 가꾸며 살았습니다. 이 작품 안에서 리디아만의 고유한 정체성은 정원사인 것이죠. 리디아는 새로운 동네에 집집마다 창 밖에 화분이 있다며 한껏 들뜬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림 속 거리 풍경에 화분이라곤 보이지 않아요. 삭막한 거리를 배경으로 서로 등지고 선 외삼촌과 리디아, 그리고 외삼촌이 운영하는 베이커리가 보일 뿐이죠.


리디아는 왜 제가 느끼는 감정들을 편지에 솔직하게 담지 못했을까요. 그건 아마 힘든 가족에게 더 이상 짐을 얹어주고 싶지 않아서였을 겁니다. 어쩌면 외삼촌네에 가기결정된 날부터 리디아는 자신을 가족의 짐으로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편지에서만이라도 걱정 없는 딸이 되려 했던 것이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웃자란 듯한 모습의 리디아는 독자로 하여금 대견함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리디아는 외삼촌을 도와 베이커리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할머니가 보내주는 꽃씨들을 정성껏 심고 가꿉니다. 덕분에 외삼촌네 집과 베이커리는 어느덧 색색의 꽃으로 다채롭게 물들죠. 어느 날 리디아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는 낡은 계단을 발견하고 그곳에 근사한 정원을 가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뚝뚝한 외삼촌을 웃게 만들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지요.


리디아가 이벤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글과 그림은 꽤 다른 장면을 펼쳐 보입니다. 결국 편지는 리디아가 의식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부분만을 알려줄 뿐이니까요. 글과 그림이 만났을 때 독자는 훨씬 더 풍부한 맥락을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결말에선 외삼촌을 위해 비밀 정원을 가꾸면서 리디아가 느꼈을 설렘과 기대감, 행복감 같은 감정이 오롯이 독자에게 전해져 옵니다. 감당하기 버거운 여러 상황 속에서도 마침내 행복을 일구어내고 마는 리디아의 삶은, 싱그러운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의 일과 닮은 구석이 많지요. 외삼촌께 정원의 생기와 사람의 온기를 선물한 리디아에게 행복한 결말이 주어지는 것은 저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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