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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an 29. 2022

21세기 한국 SF 동화의 총론

이현, 『로봇의 별』, 푸른숲주니어, 2010

* 쪽수: 496



영미권 SF 황금기를 떠올리게 하는 묵직한 SF 동화입니다.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메인 테마로 다루고 있는데,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시모프뿐 아니라 클라크도 들어가 있고 하인라인도 들어가 있습니다. 요즘은 '빅3(클라크, 아시모프, 하인라인)'라는 도 잘 안 쓰는 추세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들에게서 따온 모티프를 한국의 동화에서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꽤 반가운 일이죠.


『로봇의 별』은 로봇 3원칙에 내재하는 역설적 쟁점을 깊이 파고드는 작품은 아니에요. 그건 이미 아시모프가 바닥까지 헤집어놨으니까요. 거기에서 더 나아가는 건 적어도 동화가 짊어질 과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좀 더 심플하게 보는 게 맞고 그런 점에서 '살아있는 로봇의 성장기'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무언가에 대한 짧은 정의란 게 으레 그렇듯, 실제론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재미있지요.


이현 작가의 강점과 정체성은 SF라는 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작가의 수많은 작품들이 지닌 폭넓은 스펙트럼은 그의 역량을 단호하게 드러내지요. 『로봇의 별』도 마찬가지예요. SF가 동화로서 가질 수 있는 여러 재미있는 요소와 가능성을 다른 작가보다 훨씬 더 빨리 발견하고 이만한 규모의 작품을 집필해냈다는 건, 작가가 지닌 지적 역량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꼭 어린이 독자가 아니라도 SF라는 갈래에 일종의 진입장벽이 있다고 느끼는 독자가 읽으면 좋을 작품입니다. 사실 진입장벽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해요. 작품 속에 당연하다는 듯 전제된 세계관에 진입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다 그런 것도 아니고, 꼭 그런 것도 아니에요. 『로봇의 별』은 도입부에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몇 가지 단서에 익숙해지면 그다음부턴 그야말로 술술 읽힙니다. 진입 구간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얘기죠.


독자들이 진입장벽을 세게 느끼는 이야기는 대체로 설정이 좀 빡빡한 작품들일 거예요. 그 안에 구축된 세계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피해 갈 수 없는 경우에 특히 그렇죠. 이런 설명을 보다 보면 가끔 어색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작품 속 세계관은 적어도 거기 속한 인물들에게는 당연하고 익숙할 게 뻔한 데도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어지는 거예요. 이런 경우 아무래도 작품의 매력과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대표적으로 휴고 건즈백의 『Ralph 124C41+』가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는 『27세기의 발명왕』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인터넷에서 축약본을 읽을 수 있어요. (https://sf.jikji.org/book/pdf/01.pdf)


이런 경험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SF의 진입장벽'이라는, 어쩌면 유령 같은 장애물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SF 장르가 독자를 끌어당기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입니다. 그럴 때 추천할 만한 책들이야 아주 많겠지만, 전 특별히 어린이청소년 독자에게는 『로봇의 별』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건 적어도 한국 SF 동화라는 틀 안에서는 하나의 '총론'으로 간주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최근 들어 활발히 발표되는 SF 동화는 현실의 복잡한 양상을 세련되게 반영하는 '각론'으로 읽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흐름이나 방향 자체는 당연하고 타당하지요. 21세기를 사는 어린이의 삶은 이전만큼 단순하지 않거든요. SF든 아니든 어린이의 삶을 직시하는 좋은 동화는 절대로 어른의 편의에 맞추어 문제를 단순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각론으로서의 깊이 있는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 마땅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무언가 굵직한 흐름을 제시하는 투박한 작품이 이정표처럼, 혹은 징검다리처럼 중간중간 놓여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로봇의 별』이란 믿음직한 이정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그동안 장벽에 가려져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놀랄 만큼 재미있게 꺼내어 보여줍니다. 『로봇의 별』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벌써 하나의 벽을 허무는 경험을 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앞으로 또 어떤 동화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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