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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05. 2022

감각의 한계를 넘어

배미주, 『싱커』, 창비, 2010

* 쪽수: 224쪽



오늘 소개할 작품은 제3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배미주의 『싱커』입니다. 배타적으로 구축된 인공 세계가 있고, 그 주변부에서 호기심과 의문을 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비중 있게 등장합니다. 이런 소재를 다루는 SF가 주제를 드러내는 가장 흔한 방식은 역시 '유토피아를 가장한 디스토피아'입니다. 인간에게 이상적인 복지와 편의를 제공하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공간은, 외부의 오염원에 대해 원천적으로 닫힌 생태계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오염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섞임과 스밈, 어울림을 차단한 밀폐 구조로 자리 잡아가는 것이죠. 결국 완벽한 세계라는 허구의 장막을 걷어냈을 때 남는 것은 억압하는 권력, 그리고 순결을 향한 병적인 욕망뿐이게 됩니다. 앙상한 세계를 목격한 주인공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 즉 혁명을 꿈꾸게 되지요.


『싱커』도 정확히 같은 길을 갑니다. 어른들의 시스템은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고, 그것을 폭로하고 세계를 바로잡을 책임은 어린 주인공에게 있죠. 이런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가려진 세계의 본질을 언제 알아차리는지가 굉장히 중요해요. 이 작품은 그 깨달음의 시점을 이야기의 중간쯤에 배치함으로써 균형감 있는 서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싱커』의 전반부는 주인공 '미마' 일행이 우여곡절 끝에 세계의 진실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후반부는 잘못된 세계를 바로잡기 위한 분투를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전반부 서사가 단단하고 촘촘하게 짜여 있어서 충분히 몰입도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지상에서 살기 어렵게 된 인간들은 '베타지구 프로젝트'를 통해 한반도에 새로운 주거지를 마련했습니다. '시안'은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 지하도시이고, '신아마존'은 열대우림을 본떠 만든 숲입니다. 둘 모두 인공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야기 속에서 맡은 상징적 역할은 상반됩니다. 시안은 질서가 지배하는 정적 공간인 데 비해 신아마존은 자연의 생명력이 지배하는 동적 공간입니다. 이야기는 두 공간의 연결과 대립을 통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요.


시안과 신아마존은 표면적으론 단절되어 있습니다. 바이러스의 대창궐 이후 시안은 지상 세계와 봉쇄를 선언했다는 설정이거든요. 즉 시안의 아이들은 바깥 세계의 자연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자라는 겁니다. 하지만 곧 두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등장하지요. 그 장치가 바로 '싱커Syncher'입니다. 여기서 싱커는 게임 이름이에요. 시안의 아이들은 싱커를 통해 신아마존으로 접속할 수 있습니다. 독특한 점은 싱커가 가상의 자연이 아니라 현실의 신아마존으로 들어가게 해준다는 거예요. 즉, 싱커는 가상현실이 아닙니다. 쉽게 영화 <아바타>(2009)를 떠올리면 됩니다. 어느 정도 물리적 거리가 있는 장소에 아바타를 만들어 플레이하는 것이죠. 싱커에서 그 아바타 역할을 하는 것은 '반려수'입니다. 플레이어는 싱커에 접속할 때마다 신아마존에 살고 있는 동물 중 하나를 골라 반려수로 지정하여 그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동물이 감각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신아마존을 체험할 수 있고, 해당 동물 종이 지닌 고유의 감각을 그대로 불러와 동기화할 수도 있죠. 그런 점에서 '싱크'라는 단어 선정은 적절해 보여요. 그리고 인물들이 반려수와 싱크했을 때의 구체적인 감각 묘사는 『싱커』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이 게임은 불법적으로 유통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시안의 수뇌부가 지상 세계와의 단절을 표방한 게 의미가 없어질 테니까요. 미마는 시안 외곽의 난민촌에서 싱커를 처음 접한 뒤 시안의 아이들에게 퍼뜨리고, 곧 게임은 아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이야기는 장수 유전자 삽입, 브레인폰, 삼차원 인터페이스가 탑재된 가상현실 시스템, 홀로그램 투사기를 포함한 온갖 화려한 기술이 반영된 세계를 전제하고 있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몸으로 직접 부딪치는 것만큼 짜릿한 경험은 없겠죠. 그렇게 시안의 아이들은 싱커를 통해 외부와 자연에 대한 감각을 확장시켜 나가고, 이것은 시안의 억압적인 체제를 인식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죠. 아이들은 시안의 권력층과 전선을 형성할 정도로 단단한 연대를 만들어갑니다.


이제 주인공 미마 일행은 바이러스와 역진화를 둘러싼 음모를 파헤치며 부패한 시안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 과정에서 '유전자 귀족'과 '늦둥이'의 계급차에 관한 모티프도 유의미하게 다루어지고요. 다만 아쉬운 건 결말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힘이 눈에 띄게 약해진다는 겁니다. 커져버린 판을 개연성 있게 매듭짓지 못하고 급히 봉합한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지요. 그럼에도 『싱커』는 뛰어난 성취를 이뤄낸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무엇보다 세계를 향한 어린이의 호기심과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열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점, 그리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인간 감각의 한계를 확장시키는 가능성을 보여준 점 등은 이 작품의 가장 탁월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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