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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14. 2022

완벽한 이별

오카다 준, 『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 보림, 2006

* 쪽수: 132



나이가 제각각인 열 명의 아이들이 공원에서 야구를 하는데 괴팍한 '아마모리 씨'가 나타나 우산을 폅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오지요. 아이들은 공원 미끄럼틀 아래 터널로 들어가 비를 피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아마모리 씨가 우산을 펴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가 왔기 때문에, 대화는 자연스럽게 아마모리 씨를 주제로 흘러가게 됩니다.


예순 살쯤 되어 보이는 아마모리 씨는 '스카이 하이츠 맨션' 201호에 사는 이웃입니다. 몇몇 아이들은 그가 마법사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가 갑자기 비를 내리게 한 이유도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에 심술이 났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가만히 듣고 있던 관리인의 아들 '가쓰지'가 말합니다. "아마모리 씨…… 오늘 밤에 이사 간대." 그 말을 시작으로 아이들은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아마모리 씨와의 추억이 깃든 기억을 꺼내보입니다.


아이들이 용기 있게 꺼내보인 기억은 놀랍도록 환상적입니다. '데루오'는 저녁 여덟 시에 공원 미끄럼틀에 올라가 지휘봉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본 적이 있습니다. '이치로'는 비어있는 옆집 403호를 통해 해변에 가본 적이 있고, 그곳에서 한 여자 아이를 만나 밀짚모자를 빌려주 저물녘까지 함께 논 기억이 있요. '교코'는 이사 오기 전, 바로 그 해변에서 처음 본 남자아이와 즐겁게 논 기억이 있습니다. 남자아이는 다 논 뒤에 해변 샤워장으로 들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죠. 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기억들에는 모두 아마모리 씨가 등장해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짜릿하게 즐거웠던 순간의 감각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포착하는 눈은 오카다 준이 지닌 가장 뚜렷한 강점입니다. 『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는 그 강점이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작품이에요. 이 좁고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막상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아이들의 대화뿐인데, 실은 그게 가장 중요한 장치입니다. 생각해보면 비 오는 날 친구들과 한 자리에 모여 신비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너무나 환상적인 경험이잖아요. 조금 부풀려 말하면, 전 살면서 이만큼 즐거운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어요. 여기서는 그 대화의 소재를 어느 괴팍한 마법사로 설정함으로써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오카다 준은 아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마법 같은, 그러면서도 간결하고 명료한 판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야기 속 아마모리 씨는 아이들이 가진 호기심의 중심에 위치한 인물이자 이 작품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입니다. 아이들은 이 말없고 괴팍한 아저씨를 향해 가끔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시선에 담긴 감정도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아마모리 씨가 마법사가 아닐까 궁금해하는 것 이상으로, 그가 실제 마법사이기를 바라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듯 아이들이 미지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보다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대상이 되는 아마모리 씨가 서툴고 무해한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이겠죠.


한편 이 작품은 정든 인물을 떠나보내는 아이들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아마모리 씨와의 추억을 되새기는 장면들은 전형적인 이별의 의식이 되는 것이죠. 이 맥락에서 아마모리 씨가 마법사인지 아닌지, 아이들의 이야기가 과장되었는지 아닌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그보다 자기네 삶에 의미 있었던 어른을 떠나보낼 때 아이들의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인지가 중요하겠죠. 아마모리 씨는 분명 괴짜지만, 그럼에도 왠지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아마 아마모리 씨는 자신이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상상 속 단골 소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알면서도 기꺼이 그 역할을 맡아준 것은 어쩌면 그 자신도 같은 시기를 지나온 어른으로써 그 추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이야기의 결말에서 아이들은 멋진 판타지를 선물해준 아마모리 씨에게 꼭 어울리는 근사한 방법으로 작별의 노래를 완성하여 들려줍니다. (결국 좋은 어른은 아이들이 먼저 알아보는 법이죠.) 이보다 완벽한 이별이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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