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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16. 2022

우리가 함께 바라보는 동안에

김장성, 우영, 『하늘에』, 이야기꽃, 2020

* 쪽수: 36



좋은 그림책은 언제나 깊이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책은 되풀이해서 읽었을 때 의미가 더욱 명료해집니다. 그래서 그림책을 읽는다는 것은 글과 그림 속에 가만히 담겨 있는 의미를 한 장씩 건져 올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김장성이 쓰고 우영이 그린 『하늘에』를 여러 번 읽고 건져 올린 것들을 길게 적어보았습니다.



책을 덮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집을 나서기 전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 창밖으로 먼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먼지 한 가닥 새어 들어올 틈 없이 꽉 닫힌 차창 너머 뿌연 하늘을 흘겨보지도 않고, 그냥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로지 하늘을 보기 위해 밖에 나와본 게 언제였는지 잠깐 생각했다. 그날 하늘은 그렇게 맑지 않았고 얼굴에 스치는 바람도 조금 쌀쌀했다. 기대했던 느낌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의 하늘은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종종 이렇게 나와서 하늘을 보자고 스스로 다짐해두었다.

마음을 다해 바라보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이 요구된다. 아무 때나 바라볼 수 있는 하늘이지만 부러 마음을 내지 않으면 어느 때에도 바라보지 않게 된다. 그런 날들이 길어질수록 감각은 무뎌져 간다. 하늘을 보지 않고도 그럭저럭 흘러가는 매일은, 까짓 하늘은 봐서 뭐하냐는 무심함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렇게 발밑에 걸리는 것들만 그때그때 치우면서 걷는 삶을 이어가다 문득 나 혼자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진다. 항상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럴 때도 있다는 말이다.

김장성이 쓰고 우영이 그린 『하늘에』는 그런 나에게 언제라도 좋으니 잠시 멈추어 하늘을 보라고 말한다. 그제야 탁 트이는 시야 곳곳에 새로운 풍경이 들어온다. 처음 보는 것이 아님에도 어딘지 낯설고 생소하다.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책장을 대중없이 넘기다 알아챘다. 그동안 내 일이나 똑바로 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앞만 보며 지나온 길 위에는 이런 풍경이 없었다는 것을.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 갖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글로 써왔지만 정작 내 길 위에는 나와 내 가족만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다른 사람,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 내 길 위로 가로질러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세월호 침몰 사고와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희생자를 애도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거칠게 막으려 드는 일부, 그러나 너무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민낯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때,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전부터) 나는 조용히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불신하는 법을 익혔다. 나와 가까운 사람의 입으로 그런 말을 듣게 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시시콜콜한 대화와 데면데면한 관계만 요령처럼 늘어갔다. 아직도 내겐 이것이 최선의 사회생활이며 나아가 최선의 생존 방식으로 느껴진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괜찮을까.

생각을 멈추고 다시 책 속의 하늘을 보았다. 그래 봤자 역시 달라지는 건 없더라고 고집부려보고 싶지만 때로 하늘은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마음을 흔든다. 이 책의 표지에는 티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소년의 옆모습이 담겨 있다. 시선의 방향을 맞추어 나란히 하늘을 본다. 하늘 위 무언가를 헤아리는 듯 옴직거리는 소년의 손가락을 따라 그 마음에 떠 있을 하늘의 생김새를 가늠해 본다. 소년의 눈에 담긴 하늘은 어떤 모습일까.

표지를 넘기면 독자는 곧바로 새하얀 바탕 위에서 소년과 눈을 마주치게 된다. 소년은 여전히 고개를 들어 무언가를 편안하게 올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내가 있다. 이 책에서 처음 눈맞춤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그림책 한 장을 넘기는 동안 우리는 함께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도 하는 특별한 사이가 된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눈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긴 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있었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 근사한 여행지의 밤하늘 아래에서 아내와 함께 별을 보며 주고받던 말들을 떠올렸다. 하루빨리 그날이 돌아오기를 바라던 마음은 자연히 오늘 이 시간조차 코로나19로 힘들게 보내고 있을 사람들을 향해 갔다. 나의 멋진 휴가보다,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 먼저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책장을 넘기기는 아직 이르다. 지금 이 소년이 바라보고 있는 하늘이 나라면 어떨까 하는 공상에도 한 번쯤 잠겨보아야 하니까. 내가 하늘이라면 나는 어디에 나의 첫 번째 시선을 보낼까. 그러고 나서 하늘을 보면 왠지 하늘도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작품에서 의미 있는 눈맞춤은 이렇듯 다채롭게 일어난다.

다음 장에는 엷은 뜬구름 아래 까치 두 마리가 날고 있다. 어디로 가는 걸까. 가까운 곳,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 사이에 까치집이 걸려 있다. 집 주변에서 먹이를 구해 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고, 가족과 동네 한 바퀴 둘러보는 중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까치와 까치집이 시야 안에 함께 머문다는 점이다. 추운 겨울을 묘사한 그림 속에서도 포근함과 안락함을 느끼고 안도할 수 있는 것은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언제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만큼 반갑고 소중한 일이다.

집은 내가 아침에 나서는 곳이자 저녁에 돌아갈 곳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집은 가족이나 삶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사람이 집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자연의 수많은 동식물에게도 제 한 몸 쉬게 할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똑같이 중요하다. 작은 생명이 돌아갈 자연의 집들을 내 집처럼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면 세계는 적어도 지금보다 포근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지 않을까. 나는 모든 사람이 제 몫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당하기로 마음먹는 만큼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믿는다.

책장을 넘기면 이번엔 나뭇가지 끝에 걸린 갈색 나뭇잎이 한 장 보인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듯 보이는 이 마지막 잎새가 떨어져 낙엽이 되면, 그때부터는 눈이 올까. 계절은 돌고 돈다고 했으니 한 계절의 끝을 알리는 신호는 곧 다음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나뭇잎은 두 계절 사이의 길목에서 하나를 보내고 다른 하나를 맞이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때마다 깊어가는 계절의 색감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다 고마운 나뭇잎과 이름 모를 풀꽃들 덕분이었다.

빈 하늘 한쪽 구석에 ‘하늘에 나뭇잎 흔들린다.’라는 글이 두 줄로 적혀 있다. 즉, 내가 보고 있는 나뭇잎은 가지 끝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나뭇잎이다. 나에겐 이것이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표지로 읽힌다. 살아있는 것들은 매 순간 움직이고 흔들린다. 내 눈에 정지해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세한 떨림과 흔들림은 오랫동안 깊이 응시해야만 보인다. 그렇게 잠자는 아기의 호흡을 확인하는 부모의 눈으로 볼 때에 비로소 보이는 생명들이, 하늘에 있다.

다음 그림은 풍선이다. 색색의 풍선이 파란 하늘 위로 올라간다. 하늘에 띄우는 풍선은 대개 꿈과 희망을 상징한다. 그래선지 하늘색도 한결 밝고 포근해져 있다. 어느 축제에서 쏘아 올린 꿈들 일지, 저 안에는 어떤 희망들이 담겨 있을지를 짐작해본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의 우주를 품고 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저 풍선들은 각기 우주만 한 희망을 품고 하늘로 날아가는 중인 셈이다. 한 사람의 희망이 다른 사람의 기쁨으로 닿기를 바라며 한참 동안 그림을 보고는 다음 장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러다 문득 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이 작품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 사실을 알기 전까지 나는 그림들이 서로 다른 하늘을 따로따로 담아놓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림 속 풍경은 단절되어 있지 않다. 이번 장에선 날아가는 새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 위로 노란 풍선이 하나 떠있다. 바로 앞장에서 꽃처럼 만발했던 풍선들을 열심히 따라 올라가는 막내 풍선일 것이다. 조금 있으면 시야를 벗어나겠지만 초조하지 않다. 시선의 연결은 곧 나와 소년이 같은 하늘을 구석구석 함께 바라보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언제든 눈을 돌리면 원하는 풍경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에 불안할 이유가 없다.

그 아래로 전선들을 매달고 서있는 전봇대가 보인다. 듬직한 기둥은 말없이 새들의 쉼터가 되어준다. 새들은 그 위에 나누어 앉아 도란도란 수다를 즐기는 것 같다. 위로는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평화로운 모습이다.

하늘을 나는 것은 비단 새들뿐만이 아니다. 다음 장에선 같은 하늘에 비행기가 낮게 지나간다. 이 정도 거리에서 보는 비행기는 가끔 현실감을 잃게 만든다. 크기가 큰 것 같기도 하고 작은 것 같기도 하고, 속도가 빠른 것 같기도 하고 느린 것 같기도 하다. 저 안에 정말 사람이 타고 있을까. 새와 비행기는 크기도 생김새도 다르지만 어쨌든 같은 하늘을 공유한다. 둘의 눈에 비친 하늘은 또 얼마나 색다른 풍경일까. 궁금한 것이 늘어간다.

하늘에서 가장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은 역시 구름이다. 구름은 바다처럼 느리게 흐른다. 어렸을 때는 구름이 하늘 저쪽으로 사라져 갈 때까지 뚫어져라 보기도 했다. 꽤 오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궁금한 게 참 많았다. 몇 번은 주변 사람들에게 묻기도 했다. 저건 대체 어디로 가는 거냐고. 속 시원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그다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오히려 별일 아니라는 듯 웃는 사람들이 그때는 어른스러워 보였다. 시간은 구름처럼 흘러 어느새 나도 그들과 비슷한 어른이 되었다. 그런 나에게 책 속의 소년은 예전의 그 반가운 물음을 다시 던진다. 저것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시린 겨울에 하늘을 보겠다고, 두꺼운 파란 외투 차림에 노란 목도리까지 두른 소년의 앙다문 입매가 야무지다. 소년은 궁금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나뭇잎은 흔들리고, 풍선은 올라가고, 새는 날고, 비행기는 지나가고, 구름은 흘러간다. 모르고 지나치는 동안에도 하늘은 이렇게나 분주하다. 내일은 또 어떤 것들이 저 위에서 움직이고 있을까.

그제야 작품의 제목이 달리 보인다. 이 책의 제목은 ‘하늘’이 아니라 ‘하늘에’이다. 모두가 동경하는 하늘이지만 정작 하늘은 홀로 고고하게 떠 있지 않다. 나는 하늘이 무언가를 배척하는 것을 본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다. 하늘은 언제나 제 품 안에 조화롭게 머무는 것들을 포근히 감싸 안는다. 그래서 하늘에는 매일 매 순간 다른 풍경화가 그려진다. 하늘은 이미 나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음 장에는 해 저물녘의 도시가 펼쳐진다. 서쪽 하늘로 기울어 가는 해는 불과 몇 시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빛깔로 도시를 물들인다. 이제 바빴던 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다. 다음 하루도 잘 보내기 위해서는 이 시간부터 이어질 휴식의 질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저녁이 필요한 이유다. 나는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구호를 여간해선 믿지 않는 편이지만,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를 처음 들었을 때만큼은 가슴 뛰는 설렘을 느꼈다. 모든 노동자가 저물녘의 하늘과 태양을 가만히 음미할 수 있는 세상이 언젠가는 올까.

샛노랗던 햇빛은 금세 불그레한 노을로 번져가고, 높고 낮은 건물들 사이 경계가 조금 흐릿해진다. 붉은 해는 멀리 가라앉는데 낮은 구름 위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하얗고 파랗다.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이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매년 첫날에 떠오르는 새해를 보겠다고 동해로 가본 적은 있으면서도, 매년 마지막 날에 지는 해를 볼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364일 동안 부지런히 뜨고 지던 모든 해와 달과 별들에게도 무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달이 뜬다. 창백한 초승달이 도시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불빛들도 하나둘 켜지면서 도시 곳곳을 밝힌다. 큰길 도로는 아직도 차들로 붐빈다. 가로등과 자동차 전조등이 뒤섞여 익숙한 야경을 빚어낸다. 밤을 감싸는 하늘은 푸르지 않아서 더 아늑하다.

밤이 깊어지면 이윽고 고요한 새벽이 찾아온다. 청명한 하늘에는 별들이 높게 떠 있다. 이 시간에 보는 하늘은 분위기가 또 다르다. 고향이 물 맑고 공기 좋은 시골이어서, 어릴 땐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의 세상이 잠잠할수록 별들은 밝게 빛난다. 날이 갈수록 별을 보기가 힘들어지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먼동이 트고 아침 해가 뜬다. 하늘에 바람이 분다. 차들이 강 위에 가로놓인 다리를 바쁘게 오간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매일 아침,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라 생각하며 집을 나서지만 실은 하루 사이에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미묘하게 일어났는지 이 책은 소리 없이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동안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놓치고 지나온 것들을 새삼스럽게 둘러보며 감탄한다.

소년은 또 한 번 궁금해한다. 하늘에 해가 기울고, 노을이 붉고, 달이 뜨고, 별이 반짝이고, 바람이 분다. ‘어디서 오는 걸까?’ 아무리 손을 높게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한 천체로부터 하루치의 빛과 온기가 내려오는 현상은 신비롭기만 하다. 그 빛과 온기가 내 발밑까지 무사히 도착한 오늘을 소중히 여기기로 마음먹는다.

『하늘에』에서 물음은 세 번 던져진다. 시작은 ‘어디로 가는 걸까?’였고, 다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였다. 호기심 어린 두 번의 물음은 곧 마지막 물음, ‘왜 거기 있는 걸까?’로 이어진다. 특히 이 마지막 물음은 누군가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듯 힘 있게 느껴진다. 하늘에 무엇이 있기에 소년은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하늘에 철탑이 있다. 하늘에 광고판이 있고, 크레인이 있고, 굴뚝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 위에 사람이 있다. 높은 데서 이따금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왠지 미소 짓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책장을 넘기려다 다시 돌아보면 이번엔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다. 시무룩해 보이기도 하고,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저들은 왜 이 추운 겨울날 하늘에 올라갔을까.

우리는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아등바등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작은 동물들이다. 우리는 자연이라는 울타리를 공유한다. 그런데 왜 저들은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저들을 올려다보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을까.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와 비슷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정진호의 『위를 봐요!』(현암사, 2014)에서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수지’도 열린 창문 밖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지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무채색의 거리, 그리고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뿐이다. 처음엔 누구도 수지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수지가 자기네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연히 독자도 수지의 시선을 따라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에 야속한 눈길을 보내게 된다. 책은 도입부의 한 면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의 일러스트를 부감으로 묘사했다. 흔히 절대자의 존재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법이 이 작품에서는 소수자로서 장애인의 시선을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즉 이 이야기에서 부감 쇼트는 가장 약한 인물의 시선에 그대로 포개어진다.

시간이 지나면 현실은 변한다. 거리를 내려다보던 수지는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위를 보라 말하고, 이 부름에 한 소년이 응답한다. 드디어 수지의 시야에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수지가 거리에 내려올 수 없는 사연을 듣고 난 소년은 그 자리에 팔다리를 펴고 눕는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함께 누워서 하늘을 본다. 그 하늘에는 물론 수지가 있다. 나아가 그 모든 아름다운 광경을 목격한 내가 있다. 『위를 봐요!』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맞춤이 일어나는 순간, 수지는 고개를 들어 환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럴 때 잠깐 동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된다.

『하늘에』에서도 높이차를 이용한 시선의 구도는 일관되게 이어진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네 기득권을 사수하려는 권력자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올라간 이 사회의 약자들이다. 홍기탁, 박준호, 차광호(스타플렉스/스타케미칼), 김진숙(한진중공업), 최병승, 천의봉(현대자동차), 한상균(쌍용자동차), 장연의(SK브로드밴드), 강세웅(LG유플러스), 김용희(삼성), 박문진(영남대학교의료원), 그리고 강주룡(평원고무공장). 글쓴이의 말에 실린 이 이름들은 사측에 대화와 변화를 촉구하며 스스로 하늘에 올라간 노동자의 이름이다. 여기에 다 적을 수 없는 이름 가운데에는 고공농성 끝에 끝내 목숨을 잃은 노동자의 이름도 있다. 그들은 뭘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을까.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자신의 저서 『소금꽃나무』의 표지에 이런 글을 써넣었다.


한진중공업 다닐 때,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는 내 등짝에 피어난 소금꽃을 또 그렇게 보고 있었겠지요. 소금꽃을 피워 내는 나무들,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들, 그러나 그 나무들은 단 한 개의 황금도 차지할 수 없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는 아시겠지요?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김진숙. 그는 2011년에 한진중공업 생산직 근로자 400명의 희망퇴직 결정에 반발하며 크레인에 올라 309일간 고공농성을 했다. 나는 그때 김진숙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았고, 왜 하늘에 올라갔는지도 알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살도록 설계되지 않은 공간에서 수개월을 지낼 만큼 절박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괜한 참견 말고 내 일이나 잘하자며 외면했던 날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보다 더 괴롭고 두려웠던 건 앞으로도 계속 이대로 썩 괜찮게 지내는 일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책장을 넘긴다. 이제 소년은 아버지로 보이는 어른의 손을 잡고 있다. 내내 혼자인 줄 알았던 소년도 실은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안에선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힘겹게 하늘에 오른 노동자도, 땅에서 지켜보고 응원하는 동료 시민들도 모두 한 곳에 모여 서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시선은 연대라는 이름으로 묶여 견고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우리가 함께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에 이만큼 힘 있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시야가 점점 넓어지면서 더 많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년은 여전히 어른의 손을 잡고 있고, 어떤 아기는 목마를 탄 채로 위를 보고 있다. 그 옆에는 ‘힘내서 만나요!’라고 적은 종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간간이 손을 들어 화답하거나 힘내라며 주먹을 불끈 쥐는 이들의 정겨운 모습도 인상적이다. 표정은 제각각이지만 이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우리로 하여금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희망을 품게 한다. 그 희망은 저 높은 곳의 노동자가 스스로 내려올 수 있을 만큼은 이 땅이 더 살기 좋아질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와 믿음으로부터 온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풍선, 새, 비행기, 구름, 해와 달과 별…, 이런 것들이 있어야 마땅할 하늘에 사람이 외롭게 오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지 묻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때에야 나는 책 속의 소년과 부끄럽지 않게 마주 볼 수 있을 것 같다. 부끄럽지 않기 위해, 종종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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