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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21. 2022

알고 있었던 이야기

조남주, 『귤의 맛』, 문학동네, 2020

* 쪽수: 208



조남주의 『귤의 맛』은 동갑내기 중학생 '다윤', '소란', '해인', '은지' 네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넷은 어느덧 고등학교 입학식이 열린 강당 앞에 함께 서있죠. 독자는 이 안에서 관계와 상처, 그리고 성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동화에서 성장은 필연적입니다. 그건 딱히 진부하다거나 상투적이라고 할 만한 특징은 아니죠. 성장 서사라고 하더라도 사실 성장 그 자체가 교훈인 동화는 별로 없거든요. 그건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그럼에도 대부분의 동화가 주인공의 성장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은 독자로서의 어린이, 독자로서의 청소년이 본질적으로 성장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현실의 성장은 동화에서 그리는 것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느리고 더디며 자주 지체되죠. 정치인들을 보세요. 그 사람들이 때마다 알맞게 동화적 성장을 겪으며 자라왔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좋은 세상을 가졌을 겁니다. 현실에서는 성장이 그리 필연적이지 않다는 뜻이죠. 필연적 성장이란, 이야기 속에서나 통하는 마법입니다. 실제 삶에선 어느 것도 그 정도로 필연적이지는 않아요.


『귤의 맛』의 이야기는 네 친구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행 마지막 날 밤, 네 친구는 다 같이 학구 내에 위치한 '신영진고'에 진학하기로 약속합니다. 이야기는 이 약속을 파원으로 하여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파형과 진폭을 묵직하게 그려내고 있죠. 친한 친구끼리 같은 고등학교에 가자는 약속 자체는 너무 흔해서 독자의 눈엔 별 것 아니게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 당사자인 네 친구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합니다. 공부 잘하는 다윤이 외고가 아니라 가까운 신영진고에 간다는 건 좀처럼 가능한 일 같지 않기 때문이죠. 비단 성적 때문이 아니더라도 네 친구에겐 각자의 사정이 저마다 긴 이야기로 존재합니다. 그러니 어린 날의 약속이 깨진다 해도 네 친구는 충분히 이해받을 자격이 있고,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 과정에서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들에 무리하다 깊이 상처를 입기도 하고요. 도입부에서 그저 평범하고 훈훈해 보이던 약속은 어느새 조마조마한 긴장감이 되어 돌아옵니다. 조남주는 이렇듯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익숙한 일상의 서사에 거대한 중력을 불어넣습니다.


생각해보면 『82년생 김지영』도 그랬어요. 이 이야기가 영화로까지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파급력을 미칠 수 있었던 건, 그것이 새로움이 아니라 익숙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죠. 작가는 익숙한 일상의 풍경을 묵묵히 꺼내 보일 뿐인데, 독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놀라게 됩니다. 말하자면, '어떻게 이런 일이'가 아니라 '그래 맞아 이거였어'에 해당하는 깨달음이랄까요.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라는 겁니다. 알고 있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토록 커다란 충격에 빠질 수 있는 것이죠.


『귤의 맛』에서 네 친구가 겪은 감정도 사실 형태만 다를 뿐 굉장히 보편적인 경험일 거예요. 이들이 한 약속은 어떻게 보면 친구 사이에 당연하게 오가는, 그래서 가볍게 느껴져도 어쩔 수 없는, 별 의미 없는 말들의 파편 같기도 해요. 하지만 한때 그 약속의 당사자였던 우리는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한없이 달뜨던 시기에 나눈 비밀스러운 약속은 세계의 중력과도 맞먹는 힘으로 한 인간의 사춘기를 거칠게 빚어냅니다. 그런 점에서 『귤의 맛』은 우리 모두의 기억 속 사춘기를 재현한 데생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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